“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독일인 ‘칼 귀츨라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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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독일인 ‘칼 귀츨라프’입니다”
  • 이석훈 기자
  • 승인 2014.08.22 10:2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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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8년 고대도 들어와 복음 씨앗 뿌린 ‘칼 귀츨라프’

토마스•알렌•언더우드•아펜젤러보다 앞서 … 세계에 한글 위대성 알린 인물
고대도에서 주기도문 번역 및 감자, 포도주 재배 교육부터 의료활동까지 펼쳐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가 독일 사람인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독일 루터교 목사인 귀츨라프는 1866년에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 34년, 1884년에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년, 1885년 입국한 미국 선교사인 언더우드, 아펜젤러 보다 53년이나 앞서 1832년 조선을 선교하기 위해 방문한 인물이다.

최초 주기도문 번역 및 감자 파종
귀츨라프는 한글로 주기도문 번역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사실에 더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주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한 것. 이는 단편적이지만 한글 성경 번역의 효시라 불릴 만한 일로 여겨진다.

또한 귀츨라프는 가는 곳마다 조선인들이 읽을 수 있는 한문으로 된 성경이나 한문 전도 서적을 나누어 주었으며, 순조 대왕에게는 로버트 모리슨과 밀른 선교사가 번역한 한문성경인 신천성서(神天聖書)를 진상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조선이 한자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조선만의 문자인 한글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배워서 최초로 서양에 체계적이고 학술적으로 한글을 소개하여 세계에 알렸다. 그의 영문 소논문 ‘한글에 대한 소견’은 영어권은 물론 독일어로 일부 번역되어 독일어권에 소개되어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그는 먹을거리가 제대로 없어 곤궁한 조선인들을 위해 서양감자를 심고 재배하는 법을 실제로 조선인들의 눈앞에서 보여 주었고, 글로 써 남겨 주었다(1832년 7월 30일). 또한 야생 포도로 음료를 만드는 법을 전수했다(1832년 7월 31일).

귀츨라프는 충청도 기착지인 고대도 도착(1832년 7월 25일) 이후 줄곧 환자들을 위해 약을 처방했다. 한 예로 60명의 노인 감기환자를 위한 충분한 약도 처방(1832년 8월 2일)했는데 이 기록은 조선에서 서양 선교사가 최초의 서양 의술을 베푼 기록이다.

귀츨라프 선교사 일행은 1832년 7월 17일 장산(장산곶)에 도착한 후 22일 녹도(록도) 근처 불모도(불모도)를 거쳐 25일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소재한 고대도에 정박했다. 그들은 홍주 목사 이민회 등의 관리들을 만나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조선 국왕에게 정식으로 통상을 청원하는 서한과 한문 성경을 비롯한 26종의 책자와 망원경을 비롯한 많은 선물을 순조 임금에게 진상하도록 전달했다.

그리고 조정의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고대도에 20일을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과 전도문서와 서적 및 약품을 나눠주고, 감자를 심어주고, 감자와 포도주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가르쳐 주고, 한글 자모를 받아 적은 다음 후에 이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 교회인 고대도교회

체계적인 동북아 선교전략 구상
귀츨라프는 이후 제주도 일대를 둘러본 후, 조선, 중국, 만주, 일본을 잇는 선교기지로 알맞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선교기지인 제주도를 통해 조선을 비롯한 동북아 여러 나라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첫 번째 시작”을 언급하면서 동북아 선교를 위한 기본적인 전략을 처음으로 구상했다.

특히 고대도는 개신교를 전해야 한다는 확신으로 선교여행을 떠난 독일인 칼 귀츨라프가 뱃길을 따라 외연도-녹도-불모도-고대도 순으로 항해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귀츨라프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고대도를 기점으로 근처 도서와 내륙까지 선교활동을 벌인 곳으로 한국 선교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섬이다.

독일인 최초 선교사이기도 한 칼 귀츨라프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자신이 믿는 개신교를 전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목숨을 아끼지 않은 신념의 선교여행을 떠난 사람이다.

이러한 귀츨라프의 선교 역사적, 문화적 업적을 볼 때 궁극적으로 한국 개신교 선교원년의 역사 기록을 기존의 1884년/1885년 설에서 1832년으로 앞당겨야 할 것이란 지적이다.

칼 귀츨라프 선교를 기념하기 위해 2년 여의 준비 끝에 금년 3월 1일 은광교회에서 창립된 ‘칼 귀츨라프학회’(회장:오현기 교수, www.귀츨라프.com)는 독일 경건주의 배경 아래 귀츨라프가 한국과 해외에서 행한 선교사역에 대한 심도 있는 선교 역사적 연구를 진행하는데 취지를 두고 있다.

문화의 중계자이기도 한 귀츨라프는 서양 문화를 한국에 소개하는 세계화의 선구자인 동시에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세계에 알리는 한류의 전도사였다. 그는 토마스 선교사와 그 뒤를 이은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한국을 이해하는데 큰 길잡이가 되었다.

그동안 아쉽게도 귀츨라프에 대한 명성은 그의 탁월한 업적과 사역에 비해 가려져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학회는 귀츨라프의 선교 정신과 선교 신학을 연구 대상으로 삼을 뿐 아니라, 기독교를 넘어 그가 관심을 기울였던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분야를 포괄•통섭함에 있어서 귀츨라프의 기독교적 탐구정신을 본받고자 힘쓰고 있다.

이를 위해 외국 저명 교수들과 외국 저명 학술단체들과 함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이미 형성하여 공동연구를 진행키로 했으며, 이들이 편집자로 참여하며 ‘신학과 세계관’이라는 학회지를 발간했다.

▲ 귀츨라프 선교사 관련 주요 문서들
귀츨라프의 생애
칼 귀츨라프는 1803년 7월 8일 프러시아 포메라니아(Pomerania)의 피리츠(Prytz)라는 작은 마을의 마구상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국적은 독일이지만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다. 네 살 때 어머니가 죽고 계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14살에 스테틴시에 있는 허리띠 제조공장의 공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개혁파 목사의 아들 하이덴라이히(Heidenreich)를 만나 목사가 되려는 희망을 함께 나누었다.

1820년 17살이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사건이 있었다. 프러시아 왕 프리데릭 빌헬름 3세가 스테틴 시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귀츨라프와 하이덴라이히는 공동 작성한 장문의 시를 광장 중앙 환영 행사장에서 왕에게 전해 드린 것이다. 이 행동은 굉장한 결례이지만, 그 시를 읽은 왕은 그들의 경건함과 애국심에 감격하여 두 청년을 불러 칭찬하고 친히 각의를 열어 청년들의 소청을 들어주도록 결의했다. 귀츨라프는 과학을 공부하여 해외 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 1821년 베를린에 있는 야니케 선교학교의 왕립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 루터교 학교에서 넘치는 학구열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렬로 6개 국어를 습득했다고 한다.

1826년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은 후, 정식 선교사로 파송 받아 말래카를 거쳐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로 도착한 해는 1927년 1월 6일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이다.

그는 조선에 자신의 대한 자신의 방문이 효과 있는 선교의 결실, “이 외딴 나라에 좋은 씨가 뿌려졌고, 머지않아 영광스럽게 싹이 돋아날 것이고,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기대했다. 1851년 8월 9일 48세의 일기로 홍콩에서 숨졌고, 홍콩공원묘지의 개신교 구역에 안장됐다.

▲ 귀츨라프 선교사 기념관 전시 내부

귀츨라프와 고대도 발전 방안
고대도는 귀츨라프가 그 땅을 밟은 지 182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예장 합신총회(총회장:이주형 목사)에서는 2001년 86회 총회에서 고대도교회(담임:박원열 목사)를 귀츨라프 기념교회로 선포하고, 한국 최초 선교 기념교회(고대도) 건립 추진위를 발족, 전국의 교회들이 약 4억을 헌금하여 기념 예배당을 건립하고 2005년 헌당예배를 드렸다. 현재 기념교회 2층에는 귀츨라프 기념실이 마련되어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칼 귀츨라프 한국 선교 182주년 기념의 날’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는 백석대 조승규 교수가 ‘고대도 환경조형 프로젝트-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만들기’를 발표해 고대도의 기독교적 관광자원이 지닌 잠재력을 부각시켜 관광 활성화 방안을 모색했다.

조 교수는 세부 제안으로 세라믹과 유리를 재료로 한 ‘귀츨라프 등대’를 비롯해 둘레길 조성, 감자 포도 파종 체험장, 독일마을 조성, 귀츨라프 기념비 및 기념관 건립, 안항 추정지의 테마 공원화 등을 발표했다.

칼 귀츨라프학회 회장인 오현기 교수는 학술심포지엄 주제발표에서 “귀츨라프는 정치, 사회, 생활문화를 관찰하고 또 직접 조선인들과 교류하고 친선관계를 맺음으로써 귀츨라프 이전의 조선에 대해 기록한 다른 것보다 객관적이며, 친화적인 인간상을 가진 조선과 조선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면서 “고대도를 선교거점으로 한 그가 바랬던 것은 복음을 통한 조선과 조선인의 변화와 발전이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언급했다.

귀츨라프는 한국에 짧은 기간밖에 머무르지 못했고 또 당시에는 눈에 보이는 열매를 맺지 못했을지라도 최초의 한국 선교사답게 한국 선교의 길을 닦아놓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성과의 유무를 떠나서 귀츨라프는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고대도 역시 한국 최초의 선교지로 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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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h 2021-12-23 09:40:27
1826년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은 후, 정식 선교사로 파송 받아 말래카를 거쳐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로 도착한 해는 1927년 1월 6일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이다.

1927년--->1827년

Kimjuchang 2018-11-12 19:35:36
1) '1838년 고대도 들어와 복음 씨앗 뿌린 ‘칼 귀츨라프’에서 1838년은 1832입니다.
2) 고대도에는 하루 정박만 했고 다음날 원산도로 이동해서 그곳에서 상륙해서 선교를 했습니다.
3) 고대도 땅을 밟지 않은 귀츨라프의 선교지를 고대도라고 하는 것은 착각이며 오류입니다.
4) 원산도가 귀츨라프 선교지라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