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프로테스탄트교회 선교사는 독일인 아우구스트 귀츨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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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프로테스탄트교회 선교사는 독일인 아우구스트 귀츨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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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7.1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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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프로테스탄트교회 선교의 시작(접촉)
▲ 조병하 교수

그리스도교가 전래할 때에 조선사회의 역사적인 배경은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민비)의 세력싸움에서 찾을 수 있다. 개혁정치와 쇄국정치를 썼던 대원군은 결국 실각하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고종은 밀어닥치는 외세를 견디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포기하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선교를 위한 문도 열리게 되었다. 단지 중국에 호의적이었던 조선은 1876년 일본과의 수교를 시작으로 1882년 미국, 1884년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1886년에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등과 수교하게 되었다.

사상사적으로는 실학에 근거한 근대 지향적 의식이 발전하고 있었으나 19세기 말의 조선은 고난과 격동의 시기이었다. 국내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의 질서 등이 파괴 되어가고 있었고, 그러는 동안 봉건적 신분관계가 무너져가고 있었다. 국외적으로는 서구와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주의 싸움에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변환기에 이미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수차례 선교사들에 의하여 복음전도가 시도 되었었다. 1628년 네덜란드인 박연, 1653년 하멜 등 36명의 제주도 표류(하멜표류기), 1816년 바실 할 선장의 조선 서해안 측량을 위하여 내한하여 군산만, 추자도 등에서 마예손(로버트 모리손)목사(1783-1834)의 부탁을 받아 성경을 전파하였다.

제일 처음으로 프로테스탄트교회 선교사로 한반도에 온 사람은 독일인 선교서 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귀츨라프(1803-1851)였다. 하멜표류기를 읽고 선교사로 네덜란드 선교회에 지원하였다. 그는 로테르담에서 3년 대학을 공부하고 루터교 목사로 안수 받았다. 귀츨라프는 처음에 영국 상선 로드 암헤르스트호를 타고 1832년 7월 한반도를 방문하였다. 그는 통역관이었지만 선교사의 직분을 소홀히 함이 없이 귀중한 선교의 기회로 활용하였다. 암헤르스트호는 압록강과 한반도 서해안을 탐사하며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귀츨라프는 약 한 달 간 충청도 서해안 고대도에서 머물면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는 ‘양이’라는 사람에게서 한글 자모를 쓴 것을 받았고, 또한 양이에게 한문 주기도문을 써 주고 그것을 한글로 쓰게 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쪽 복음 서책과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세주임을 전해 주었지만 무관심하였고, 이를 보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귀츨라프는 그곳에 머물면서 지방 관리나 주민들과 접촉하면서 순조에게 통상요구서와 성경전서 2권을 보내 무역과 선교를 청원하였으나 순조는 성경을 되돌려 보내고 요구를 거절하였다.

다음으로 한반도를 찾은 선교사는 웨일즈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이었던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1840-1866)였다. 그는 런던대학 뉴 칼리지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1863년 12월 런던선교회의 파송으로 부인과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4개월 후 그는 부인을 잃었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마침 한국에서 병인교난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받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반도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1865년 9월 토마스는 산동성 지푸에서 세관통역으로 일하는 동안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이었던 알렉산더 윌리엄스를 만나 한반도 선교를 다시 준비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두 명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를 만나 글을 배웠고 함께 배를 타고 황해도 창린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많은 양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들어와 두 달 동안 선교하였다.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한 토마스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북경에서 개화파의 거장 박규수와의 짧은 만남이 이었다. 평양감사 박규수와의 만남은 토마스의 평양행을 사모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1866년 8월 런던선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중무장한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통역관으로 나서게 되었다. 셔먼호는 한 달 후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이르렀다. 선원은 토마스를 포함하여 백인이 5명 이었고 청나라와 말레이시아인 19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통상을 시도했으나 거부당하고 썰물에 배가 자유롭게 항해할 수 없게 되자 화공으로 공격을 받아 배는 불타고 승선했던 모든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다.

토마스는 이 때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흥분한 수병에 순교하였다. 토마스 목사를 죽인 사람은 착한 사람을 죽였다면 후회했다고 하며, 토마스가 죽기 전에 전해 준 성경을 벽지로 사용했는데 벽지에 쓰인 말씀을 읽는 중에 회심하였다고 한다. 그의 조카 이태는 신자가 되어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선교사 이눌서(윌리엄 레이놀드, 1867-1951)를 도와 성경번역을 하였다. 마포삼열(사무엘 에이 모펫, 1864-1939) 선교사는 자신이 세례를 베푼 사람들 중에 성경을 토마스에게 받아 읽게 되었었다고 하는 이가 있었음을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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