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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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3)
  • 운영자
  • 승인 2014.05.0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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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생언이란 어떤 곳인가?”라고 말할 때 혹자는 유배자들의 은신처 같은 곳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부모로부터, 자식들로부터,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갈 곳이 없어 마지막으로 찾는 곳 아닐까?’하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처음 소생언이 문을 열었을 때 동네에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수사관들이 찾아와 혐의를 찾곤 했다. 소생언 사람들이 피신해온 몇 사람을 설득해 수사기관에 자수케한 이후로는 소생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소생언이 시작되었을 때는 자립조차 어려웠다. 세월이 지나 자립했을 때는 지역 주민들의 배타성과 시기심으로 존폐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소생언이 서서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유배자의 은둔처란 오명에서 벗어나 꿈을 찾아오는 곳으로 변했다.

소생언이 더 알려지게 된 것은 창조의 집 청년들이 만든 작품들이 국전에 출전해 특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창조의 집 전시장에는 소생언 식구들이 만든 여러 가지 작품들이 전시, 판매되고 있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견학을 온 초등학생들로 붐볐다.

SB병원 1004호실 곽진언 할아버지가 입원한지 3일이 지났다. 그는 부정맥을 판명받았다. 상태에 따라 심장이 뛰지 않고 사망하는 경우도 발생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진선린과 김창진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선린 선생, 내가 소생언에 오게된 것은 자네 부친과는 친구사이였기 때문이라네.”
곽진언 할아버지가 말했다.

“자네 부친께서 비룡산 삼일원에 계실 때 나에게 빚을 진 것이 있네.”
곽진언은 선린의 손을 잡은 채 말을 하고 있었다.

“저의 아버님께서 얼마나 빚을 지셨습니까?”
“고향에 있는 자네 큰아버지가 비룡산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 집과 전답을 마련한 돈이었네.”

선린은 큰아버지가 사는 집과 다섯마지기의 논, 1천 평의 과수원을 그의 아버지가 어떤 분의 도움을 받아 사주신 것을 어머니께 들어 알고 있었다.

“내가 친구의 아들인 자네를 나의 아들로 생각하고 부탁을 하나만 해도 될까?”
“말씀하십시오.”
“나는 자네 아버지에게 빌려준 것을 꼭 받으려고 생각은 하지 않네. 그러나 내가 나를 믿어준 사람들에게 갚아야 할 빚을 갚지 않고서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어서 걱정이네.”

선린은 수십 년이 지난 아버지의 빚을 갚아야 할 법적인 의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기 보다는 아버지의 명예에 관한 문제였다.

선린은 곽진언 할아버지의 에세이 ‘길을 묻는 청년들에게’란 저서를 밤을 새워가면서 읽었던 것을 생각했다. 또한 곽진언의 아들들이 그를 부양하지 않고 있으며, 출판사로부터 그가 쓴 책의 인세를 받아 생활비로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의 아버지께서 지신 빚을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창진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러다가는 소생언이 또 다시 없어지는 것일까 걱정 되었다.

“자네와 내 자식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사람은 행한 대로 보상을 받게 된다’라는 말을 꼭 명심해 주게.”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여한 없이 눈을 감을 수가 있겠네. 자네가 나의 아들 역할을 해주어서 고맙군.”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왕 부탁을 받아주었으니 하나 더 부탁해도 되겠는가?”
“말씀하십시오.”
“우리 아들들을 만나 내가 진 빚을 나 대신 갚아 줄 수 있나 물어봐주겠는가?”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린과 김창진은 소생언으로 돌아왔다. 김창진은 병원에서 소생언으로 가는 중에 선린에게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채 시무룩한 표정으로 있었다.

“자네 왜 말이 없는가?”
“선생님, 거절해도 되실 것을 왜 받아주셨어요?”
“아버지가 못한 일을 나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수중에 아무 것도 없으시면서 소생언 농장을 처분해 갚으려는 것은 아니시겠죠?”
“소생언은 소생언 식구들의 것일세. 내가 갚아야 할 것은 내 개인적인 문제야.”
“마치 떼돈이라도 가진 사람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곽진언의 둘째 아들 곽후안이 소생언으로 선린을 찾아왔다.

“우리 아버지께서 어디 계십니까?”
“지금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네.”
“이런 것들이 저의 집으로 왔습니다.”

그는 선린에게 곽진언 씨에게 온 채권최고장을 주면서 말했다.

“자네가 부친을 위해 갚을 수 없는가?”
“저는 그럴 만한 형편이 못됩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후 상속 포기를 하지 않으면 아버님의 부채를 상속받는다는 것을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편지가 오면 나에게 보내주게.”

곽진언 할아버지는 입원 후 7일 만에 운명했다. 곽진언 할아버지는 운명하기 하루 전,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선린에게 그가 간직한 유언증서를 맡기며 말했다.

“자네 나와 약속을 할 수 있는가?”

“말씀하십시오.”

“상속 포기 기한이 지날 때까지는 나의 유언증서의 존재와 내용을 비밀로 해주겠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나 더 부탁할 일이 있네.”

“나는 반드시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네. 그동안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네. 그 일을 자네가 해주었으면 고맙겠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평생 후회 속에서 살았어. 나의 첫사랑 그녀를 붙잡지 못한 것이 나의 일생일대의 돌이킬 수 없는 과오였다네. 나는 그녀를 잃은 상실감 때문에 평생 괴로워하면서 살아야 했어. 그녀를 잃은 상실감 때문에 새로운 행복을 찾고 찾아도 진실한 행복은 찾을 수 없었다네. ‘아, 이것이 나의 운명인가!’ 하며 좌절한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 세찬 운명의 파도를 극복하지 못하는 패잔병처럼 되어버렸다네. 내가 사랑이란 명제를 놓고 씨름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나를 철학자라고 부르더군. 웃기는 일 아닌가? 사랑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람 별명치고는. 자네는 절대로 나같은 과오를 범하지 말게나. 옳으면 옳은 대로 행동하고 아니면 아닌 대로 해야 할 것 아닌가?”

선린은 곽진언 할아버지가 얼마의 빚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맡긴 유언장의 존재도 혼자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선린은 곽진언이 그에게 한 마지막 말이 귀에 생생히 남았다.

“바다에 풍랑이 없으면 좋은 뱃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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