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인가, 비엔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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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인가, 비엔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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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4.09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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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 / 새에덴교회 / 시인

서구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전투를 아는가. 그것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전투와 1683년 비엔나 전투이다. 두 전투의 공통점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국가 운명의 사활을 걸고 벌였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콘스탄티노플 전투는 이슬람의 승리였으며 비엔나 전투는 기독교의 승리였다. 두 전투를 살펴보면, 현재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혼란과 쇠퇴의 근본적인 문제와 미래 전망을 할 수 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도성은 3중으로 되어 있고 높이가 20m였으며 외성벽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철옹성이었다. 그래서 그 도성이 점령을 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러나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결과 성 소피아 성당을 비롯하여 100여개에 달하는 정교회의 거대한 성당이 이슬람의 모스크로 바뀌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동로마교회가 성화파와 성화반대파가 나뉘어 성화논쟁을 벌이며 끊임없이 분열하였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 3중 성벽을 무너뜨린 대포를 만든 사람도 우르반이라는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성화반대파들 중 1만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메흐메드 2세에게 돈을 받고 이슬람의 군사가 되어 기독교를 무너뜨리는데 앞장섰다.

오죽하면 메흐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 도성을 점령한 후에 성 소피아 성당의 문을 열면서 이렇게 외쳤겠는가.“내가 아는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였다. 그러므로 너희들에게 알라의 이름으로 평화를 주러 왔노라.”

뿐만 아니라 서방 기독교 국가들도 동로마제국의 황제 마누엘 2세가 위기를 직감하고 구걸 외교를 하였을 때 교리와 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도와주지 않았다. 그 결과 콘스탄티노플 전투는 메흐메드2세가 이끄는 이슬람군에 의해 처참하게 도륙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1683년 비엔나 전투는 달랐다. 당시 오스만 튀르크의 황제는 메흐메드4세였다. 당시 최고 재상이었던 무스타파가 로마 교황청이 있는 베드로성당을 모스크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고 3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다. 그런데 서구 기독교 국가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황금사과로 불리던 비엔나를 먼저 정복해야 한다. 만약 유럽의 관문인 비엔나마저 이슬람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전 유럽은 순식간에 이슬람화 되어 버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때 베네치아의 수도사였던 마르코가 전 유럽 교회들이 하나 되어야만 이슬람 대군을 물리칠 수 있다며 연합을 호소한다. 당시 오스트리아 성내에서 군사로 나설 수 있는 남성의 총 인원은 1만 5천 명에 불과했다. 비엔나는 이슬람의 30만 대군 앞에 먹잇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구 기독교 국가들이 총집결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오스트리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폴란드의 왕 얀 소비에스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와서 비엔나 전투를 총 지휘한다. 그가 참전을 결정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비엔나가 무너지면 폴란드도 이슬람화 될 것이며 기독교의 위대한 전통과 유산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얀 소비에스키 국왕이 이끄는 7만의 서구 기독교 연합군은 무스타파가 이끄는 30만 이슬람군을 격퇴시킨다. 그 결과 무스타파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메흐메드 4세에 의해 처형당한다. 그리고 이슬람은 비엔나 전투 패전을 기점으로 점점 세력이 약화되면서 유럽에서의 패권을 잃어버렸다. 반대로 서구 기독교는 단결하고 뭉치면서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찬란한 기독교 문명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인가, 1683년 비엔나인가. 현재 한국교회를 망치고 있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내부 분열이다. 오직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로드십 신앙 아래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분열하고 다툰다. 여전히 교권과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과 다툼이 난무하다. 우리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하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은 종임을 고백한다면 서로 하나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분열하면 1453년 콘스탄티노플처럼 참혹한 최후를 맞을 것이요, 십자가의 깃발 아래 연합하면 1683년 비엔나처럼 찬란한 승리를 거둘 것이다. 이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인가, 1683년 비엔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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