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혁신학회가 ‘제108차 정기 학술발표회’를 열고 기독교인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명했다. 성경적 관점에서 그리고 칼뱅의 관점에서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자세로 교회를 섬기고 사회를 섬겨야 하는지를 말했다. <편집자 주>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내용의 모든 말들에서 예수의 죽음이 속죄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만 여기면서 그 이상의 다른 것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만찬에서 잔에 대하여 ‘많은 사람을 위하여’라고 설명한 마가복음의 내용은 속죄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를 위하여’라고 설명하는 것을 자명하게 속죄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성에 대하여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은 우선 일반적인 의미인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익’이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왜곡되어진 신의 법의 본질과 마주서도록 하기 위한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신이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시인하기만 하면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익’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를 위하여’는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결코 천국으로의 ‘무임 승차’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를 위하여’는 ‘대속’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여러 유형의 이해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작금에 기독교는 현대인들에게 신뢰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삶 속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아니 오히려 사회에서 범죄자로 판결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삶의 변화 없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마치 천국을 소유한 것처럼 당당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는 그것을 용인하는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근원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오해가 있다. 자신의 범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속’이라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모든 범죄가 소멸되고 그리스도가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여기는 그릇된 ‘구원의 확신’은 기독교의 근본을 흔들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기독교의 기초로 여겨지고 있다. 기독교는 이러한 잘못된 인식 구조를 포기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삶을 어떻게 신의 뜻에 일치시키며 살아가는 지보다 ‘가시적 교회 성장’을 더 우선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시적 교회 성장’이 당연히 ‘신과의 관계성’을 가진 것이라고 여기는 순환 고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신은 ‘인식’되고 ‘경험’되어졌으며, 그 내용은 전통을 이루고 교육의 형태로 전수되며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과 ‘경험’의 근거에 대한 원초적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 논문은 기독교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것을 그만두기 위한 시작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당연히 ‘천국’ 가는 것으로 여기는 비상식적 오해로부터 인간은 피조물의 자리로 되돌아와서 그동안 자신과 타인과 집단에 거침없이 행했던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한 ‘인식적’, ‘경험적’ 판단에 대하여 ‘판단 중지’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인간의 판단이 ‘심판대’에서 행하실 그 분의 ‘고유 권한’인 심판을 결코 폐기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전승 속에서 광범위하게 마주치는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화해의 능력에 대한 표현들은 ‘신과 신의 나라를 위한 인간의 움직임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지 그러한 인간의 움직임과 상관없는 것, 오히려 그러한 움직임을 ‘중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되어질 때 그러한 설명들은 유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방향성의 신학적 논의가 개혁신학회 내에서 계속되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