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만나고 인생 3막의 시나리오가 바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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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만나고 인생 3막의 시나리오가 바뀌었어요”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4.03.04 2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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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부자 전도사’된 김경식 장로
▲ 종탑이 있는 고향의 정취가 있는 교회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김경식 장로. 그는 장로가 되어 교회 깊숙이 들어와 봉사하며, 고난을 겪으며, 성경공부를 하며, 회개하며 진짜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여기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사람이 있다. 비행기 타고 다니며 젊어선 외국에서 비즈니스도 열정적으로 해봤다. 처음엔 좀 간당간당했지만 크게 성공했다. 돈을 좀 벌자 50대에 조기 은퇴해서 귀국. 남한강변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산다. 계절마다 형형색색 패션쇼를 하는 산과 강을, 거실에서 비스듬한 자세로 감상할 수 있다. 이제 여생을 즐기기만 하면 오케이.

꿈에 그리던, 김경식 장로(63. 성덕교회)의 인생 3막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인생 1막이 성장기라면, 인생 2막은 가족과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시기. 인생 3막에선 자식들 다 출가시키고 홀가분하게 세계여행이나 다니며 나 자신을 위해 살겠다. 이것이 원래 김 장로의 인생 3막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수정됐다. 그것도 완전히. 그는 내년에 방글라데시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을까?

다 부러워할 조건이지만
인생 1막이 시작된 경북 예천에서 그는 경북고등학교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직장생활을 하던 중 가방 제조업에 눈을 뜨게 된다. 1990년, 30대 후반에 방글라데시로 가서 가방 공장을 세웠다. 처음엔 암담한 일들이 잇달았다.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몇 달 만에 해일이 덮쳤습니다. 처음 만들어 선적을 대기하고 있던 가방이 모두 물 속에 잠겼죠. 2년 쯤 되었을 때에는 납기일을 맞추느라 비행기 삯을 억울하게 부담해 56만 불을 날린 일도 벌어졌고요. 게다가 아내가 암에 걸리는 일도 생겨서, 그땐 정말 힘들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아침마다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그래도, 다음날 눈을 뜨면 아직 살아있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사업은 점차 안정됐다. 건설회사를 차려 연립을 분양하고, 360만 평 홍차농장을 인수해서, 차 나무도 100만 그루 이상 심었다.

나이 50대 초반이 되자 회사를 좋은 가격에 넘기고 귀국했다. 경기도 양평에,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집을 지었다. 잔디 깔린 앞마당은 운동장만 하다. 여름엔 수영장도 만들 수 있다. 뒤에는 남한강이 도도히 흐른다. 날 좋은 날, 아니 날 궂은 날은 더 좋지, 거실에서 차 한 잔 하며 그 풍경 감상하는 맛을 누가 알랴.

“그때 머니투데이에서 제게 인터넷에 재테크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부탁을 해왔어요. 그때 한참 10억 부자 만들기가 유행했는데, 제가 경험한 노하우를 거기서 알려주었죠. 그때 제 필명이 ‘부자 전도사’였어요. 조회수가 몇 만 건이 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죠. 제 팬들이 부자 동아리를 만들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들에겐 김 장로가 ‘롤 모델’이었다.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일찍 은퇴해서, 양평 같은 곳에 풍경 좋고 정원 넓은 집을 지어, 여생을 즐긴다! 그런데 정작 롤 모델인 김 장로는 마음에 기쁨이 없었다. 꿈에 그리던 인생 3막, 이기적으로 편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이 다 구비되었는데도 마음은 늘 헛헛했다.

▲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늦깎이 공부 하느라 항상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서도 그는 늘 즐겁다.

‘비즈니스 선교’에 눈뜨다
“그때 제가 장로로 임직을 받습니다. 장로가 되면서 제가 바뀐 겁니다. 방글라데시에서도 교회를 다녔지만 한국 교회는 또 다르더라고요. 특히 장로가 되어 교회 깊숙이 들어와 보니, 참 힘든 것이 많아요. 봉사하면서, 고난을 겪으면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참 많이 회개했죠. 내가 헛살았었구나. 방글라데시에서 사업할 때에 이런 마음으로 했더라면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 되었을텐데.”

이기적으로 살아보겠다던 인생 3막은 여기서 내용이 완전히 변경되었다. 방글라데시에 빚진 자라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서 선교사로서 여생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결심이 섰다. 마침 집 가까이에 있던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선교학과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더니, 하나님께선 김 장로의 꿈을 여물게 할 사람들도 붙여주셨다.

“작년에 요르단 단기선교를 갔다가 비즈니스 선교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해준 분들을 만났어요. 비즈니스 선교는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선교사와는 좀 다릅니다. 선교 마인드와 사업 마인드는 다르니까요. 성경에서 둘씩 짝 지워 보낸 것처럼, 비즈니스 선교는 사업에 소질 있는 사람과 헌신된 사람이 팀을 이루는 게 좋지요.”

마음만 있으면 길은 열린다. 돈이 없어서 선교를 못한다거나, 의사나 간호사처럼 전문직종이 아니어서 선교 못한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한 예로,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비자 받기 힘든 이슬람권에서 스포츠인 바둑을 통해서 길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짧은 기간이지만 방글라데시 선교를 준비하는 동안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물질도 채워주신다는 것을 체험하고, 걱정도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시련 역시 각오하고 있다. 믿음생활을 좀 해보니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사탄이 제일 먼저 알고 움직이더란다.

“한국에 들어올 때 즈음에 큰 시험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새벽기도까지 다니며 정말 뜨거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했거든요. 그런데 엄청난 험담에 휘말리더라고요. 그땐 주기도문을 못 외웠어요, 분노가 끓어올라서요. 아니 제가 나쁜 짓 할 때 그런 일이 생겼다면 이해가 되지만, 새벽기도까지 다니며 이제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보겠다고 하는데 그런 일이 생기더라고요. 누구처럼 저도 그 미운 사람을 손 좀 보고 싶었는데, 결국 용서했어요. 저 자신을 위해서 용서한 거죠.”

▲ 항상 앉아 기도하는 자리에서.
믿음 좋을 때 시험오더라
믿음이 한참 좋을 때 꼭 시험이 찾아온다는 건 불변의 진리다. 그러나 시험을 통해서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 역시 불변의 진리. 김 장로는 그 일을 통해서 영적으로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감사해 한다. 그 후 장로로 임직되었고, 여기까지 왔다.

‘부자 전도사’로 한참 이름을 날릴 때다. 술잔이 오가는 송년회 같은 자리에 모이면 부자동아리 사람들은 김 장로를 ‘전도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때 주변에서 뜨악한 표정들, 아마 사이비 전도사인줄 알았으리라. 이제 진짜 ‘전도사님’이 되었다. ‘부자’를 뗀 전도사. 아니 오히려 그 앞에 하나 더 붙이자. ‘진짜’ 부자 전도사.

방글라데시에 육신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진짜 부자가 되게 하는 복음을 전하러 갈 것이다. 그의 나이 63세. 떠나면 언제 돌아 올 수 있을까. 아내에겐 “나 죽었다고 생각하라”고 틈틈이 세뇌 중이다. 그런데, 김 장로의 표정은 도무지 비감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요즘처럼 신날 때가 없다고. 그러고 보니 취재 내내 그는 싱글벙글했다.

남한 강변의 그 좋은 집을 떠나 낙후된 방글라데시로 가야 하는데, 모두가 부러워하는 조건을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하는데, 그는 마냥 좋다. 지난 겨울엔 더운 나라에서 공부하러온 학생들이 얼마나 추울까, 안타까워서 따뜻한 겨울 점퍼를 여러 벌 사주었다고 한다. 자기 옷도 평생 안 사보았던 그는 처음 옷을 사러 돌아다녔다고 웃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을 참 조심해서 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처음 방글라데시에 사업하러 갔을 때 그랬거든요. 방글라데시에서 뼈를 묻겠다고요. 그런데 이제 진짜 뼈를 묻으러 다시 가려고 하잖아요. 이번엔 돈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러 가지요. 하나님의 섭리는 참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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