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 개혁운동, 성령의 바람인가? 거짓 예언자의 나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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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도 개혁운동, 성령의 바람인가? 거짓 예언자의 나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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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2.11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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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덕형 교수(서울신대)

‘신사도운동’이 한국 교회 복음주의계열의 많은 교회들과 신학교 내에서 많은 비판을 얻고 있는 가운데 한국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 박사)은 2월 월례회에서 신사도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함께 한국 교회 내의 성령운동에 대해 미칠 수 있는 양향을 전망했다. <편집자 주>

한국에서 신사도 운동에 대한 평가는 커다란 논란거리다. 한국의 많은 성령운동이 다 이 신사도 운동과 다 연루되어 있다고 고발되었기 때문이다. 해당 단체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성령운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와 달리 이단적이라고 비난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주로 지금까지의 고발들은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 운동이 연관을 갖고 있는 조직들의 배후와 그 조직들의 책임자 사이에 있는 상호 연관관계를 분석하면서 개괄하고 있지만 정작 와그너가 자신의 신사도 운동이 근거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 전통 교회의 다양한 선교현장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와그너는 특히 미국 내의 은사주의 교회의 성장과 함께 지구 남반구에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교회의 부흥에서 세계교회의 미래를 보고 있으며 그 거대한 흐름을 배경으로 하고서야 구체적으로 예언자 그룹 등을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신사도를 비판하는 그룹들 중에서도 어떤 단체는 신사도 운동이 지나친 신비주의에 기초한 은사운동에 열중하기 때문에 비판한다. 하지만 또 다른 그룹은 신사도 운동이 사도성에 대한 신학적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을 하는 것이다.

물론 신사도 운동과 연루되어 있다는 일부 단체들의 집회 모습 속에서는 정상적인 예배에 익숙한 우리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들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외적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 그 내부의 신비주의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이 비판들 배후에서 찾을 수 있는 은사 중지론이나 사도성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한 번 해볼 필요가 있다. 신앙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핵심적 판단기준인 성서가 이 두 주장에 대하여서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은사중지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기독교회는 성령자체를 종말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로 알고 있었으며 그 성령의 역사가 바로 다양한 은사들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은사 중지론이냐 은사가 지속되는 것이냐는 질문 자체는 진부한 것이다. 성령의 사역이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부정하거나 부인할 수 있겠는가?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 운동은 한마디로 ‘새로운 교회형성 프로그램’이다. 그것도 경영적 관점에서 시작된 새로운 형태의 홍보프로그램이다. 매우 거창하게 그는 2001년을 제2의 사도시대를 알리는 시대라고 선포한다. 이는 전통적인 교단의식이 희미해지는 현실과 더불어서 생기게 되는 새로운 교회시대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교회는 교리적인 문제로 파생되는 것인가? 와그너는 분명하게 교리의 변화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경의 권위나 이신칭의 그리고 만인제사장직 같은 것을 건드릴 수 없으며 앞으로도 그에 대한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변화는 “교회가 운영되고 사역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재구성”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이 와그너의 변화가 주로 교회경영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그가 제시한 사도의 사역에 대한 정의 때문이다. 또한 그는 현재의 교회정치제도로는 창조적인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신사도 운동을 통하여 비판할 점과 여기서 드러나는 새로운 점들을 보아야 한다.

신사도 운동이 사이비적 요소가 있을 수 있고 그 사도성이란 주장자체가 임의적일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신사도 운동이 새로운 변화의 한 표지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에서 발생한 미국식 실용주의 기독교의 한 모습이다. 그러나 명백해 보이는 것은 그들은 교파시대가 더욱 발전하여 이제 새로운 형태의 복음주의 시대가 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선점한 것이다.

만일 그들에게서 문제가 발생하였다면 이것은 우리 한국교회에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가오는 새로운 성령의 선교에 복음적인 한국적 신학이 나타나도록 한국에서의 다양한 성령운동을 지켜주고 보호해주어야 한다. 그들을 지도해서 한국교회가 명실공히 세계의 지도적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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