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 운동은 말씀과 성령의 열매를 신비적 체험으로 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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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도 운동은 말씀과 성령의 열매를 신비적 체험으로 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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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2.11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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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박사(한국기독교학술원장)

‘신사도운동’이 한국 교회 복음주의계열의 많은 교회들과 신학교 내에서 많은 비판을 얻고 있는 가운데 한국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 박사)은 2월 월례회에서 신사도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함께 한국 교회 내의 성령운동에 대해 미칠 수 있는 양향을 전망했다. <편집자 주>

교회성장학자로 잘 알려진 미국 풀러신대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1980년대 일어났던 ‘제3의 물결운동’에 대하여 1990년대 들어와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자 했다. 처음에는 탈교파주의(postdenominationalism)라는 용어를 실험적으로 붙였는데 교단 친구들의 항의를 받아 ‘신사도 교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와그너는 21세기 새로운 교회의 형태를 ‘신사도적’이라고 부르면서 신사도들의 모임인 국제사도연맹(ICA)을 결성하였다.

2008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도미니언』(Dominion)에 의하면 현재 국제사도연맹에는 5백명 이상의 사도들이 소속되어 있으며 이들은 모두 “정통 사도”로서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신사도적 교회가 초대교회의 사도적 권위와 능력을 그대로 연속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이 ‘초자연적 능력’을 강조하면서 기적이나 표적이 초대교회 사도들이 행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교회의 갱신운동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성령과 은사운동이 오늘날에도 지속한다는 은사지속론을 신사도 교회에서 실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세대주의 영향을 받은 전통교회가 은사중지론을 잠재우게 하는 목회현장적인 새로운 체험을 제시해주고 있다.

개혁교회를 비롯한 공교회는 오늘날 사도적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 정경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지속적 역사를 인정하는 오순절 교단인 하나님의 성회조차도 오늘날 사도와 예언자의 명칭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와그너는 사도를 신약성경의 패턴에 따라서 인정하고자 한다.

1994년 빈야드 운동이 캐나다로 가서 일어난 토론토공항교회에서 일어난 토론토 블레씽 운동의 경우 교인수의 절반 이상은 첫 교회 방문시 감각적으로 보고 쓰러지는 기사와 표적에 단번에 매혹되어 회원들이 됐다. 이러한 결신(結信)은 초대교회나 18세기 뉴잉글랜드의 노스햄프턴교회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하여 일어난 말씀에 찔림을 받아 통회 자복하고 회심에 이른 부흥운동과는 너무나 다르다. 이러한 쓰러짐의 현상은 서인도 제도에서 기인했으며 미국 남부의 주술종교인 부두교나 퀘이커 종교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복음 전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단이란 교리적으로 사도신경을 거부하고 제도적 교회를 부인하는 집단들을 말한다. 오늘날 교회나 신자들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영적 현상을 모두 귀신의 현상이나 점성술로 보는 것은 혹시나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영들을 분별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 없이 함부로 정죄하는 것보다는 그러한 은사를 받은 자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이들이 받은 은사를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을 높이는 방향으로 사용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할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신사도 운동은 오늘날 신자들의 신비로운 체험에 비추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는 죄인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열매를 인간의 신비로운 체험으로 끌어 내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성경을 통한 하나님 말씀과 고차원적 윤리를 소홀히 하고 신비적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를 이교도적 체험으로 변형시키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신사도운동에 비판할 부분이 많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사도운동 자체를 성령운동이 아니라 부정하고 전체를 사이비라고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 대하여 애정어린 마음으로 비판을 가하고 이들이 제도권 교회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운동에 대하여 은사중지론에 선 비판가들의 피상적인 비판에 근거하여 무조건 정죄만 하려고 하지 말고 이들의 일차적 자료들을 신학적으로 심도 있게 연구하여 이들의 공과(功過)를 학문적으로 지적하고 그 대안을 바르게 제시하는 것이 요청된다. 단시일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서 살펴보면서 그 열매를 보아서 그 운동의 정체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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