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르포] 미혼모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두리홈’에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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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르포] 미혼모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두리홈’에 초대합니다
  • 김목화 기자
  • 승인 2013.12.19 1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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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미혼모가 자립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도와주는 구세군 ‘두리홈’

스스로 자립해 아이와 함께 살 집 마련까지
학업부터 취업까지 다양한 지원 사업 적극 나서


이 세상의 모든 미혼모는 아프다. 많이 아프다.

일반적으로 ‘미혼모’ 하면, 철부지 10대 시절 ‘사고’ 친 여자아이들을 떠올리기 쉽다. 또 아이를 낳고 남편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기 쉽다. 그래. 쉽다. 그렇게 생각하기까지는 참 쉽다. 하지만 그들의 속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 모든 ‘사고’의 원인은 ‘우리’의 잘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부산에서 17세의 미혼모가 4개월 된 아들을 모텔방에 두고 외출해 후배와 함께 유흥가에서 밤새 노는 사이, 혼자 남겨진 아기가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제 앞가림도 벅찰 열일곱 나이에 ‘엄마’의 책임까지 떠안기는 무리였을까. 하지만 모텔방 영아 사망사건은 미혼모 혼자의 탓으로 단정짓기에는 딱한 구석이 많다. 아기 아버지는 엄마와 동갑내기로 올해 초 소년원에 수감됐다. 게다가 미혼모 소녀의 어머니 역시 미혼모로, 소녀는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고 엄마와도 연락이 끊긴 채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신 처지였다. 일방적으로 돌을 던지기 힘들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청소년 미혼모가 이용할 미혼모 보호 시설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시설 이용을 꺼리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또 청소년 미혼모들에 대한 실질적인 성교육이 필요하고, 청소년 미혼모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온라인 상담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미혼모 시설 이용을 꺼리는 걸까? 미혼모 시설은 법적으로 1년 동안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를 임신한 9개월, 그리고 남은 3개월로는 미혼모와 아기에게 불충분한 시간. 매년 ‘실적 높이기’에 급급한 미혼모 시설들과 달리, 12개월 후 ‘퇴소’해야만 하는 조건은 미혼모들에게 매우 가혹하다. 이는 ‘미혼모 대물림’의 주된 원인이 되기도 하다.

미혼모와 아기, 둘이 하나 되고 하나가 둘이 되는 집, 구세군 ‘두리홈’(원장:추남숙)은 다르다. 두리홈에 둥지를 튼 미혼모들은 새 둥지를 틀 때까지 두리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조건이 있다. 반드시 ‘자립’하는 것. 하지만 이마저도 두리홈에서 물심양면은 물론 기도까지 적극 도와주기 때문에 걱정할 건 없다. 출산 전부터 아기를 입양할지 양육할지에 대한 여부를 엄마가 스스로 결정하고, 두리홈에서 지원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입양시에는 입양 기관과 연결하고, 미혼모를 위한 교육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후원자를 발굴한다.

실제로 두리마을에 살다 자립한 두리맘들은 미혼모 문제 해결방안의 모범답안이 될 수 있다. 지난 2011년 태어난지 3일 된 아기 하람이를 데리고 두리홈을 찾은 박지민 씨(당시 나이 18세)는 몸조리와 적응기간을 채우기 전에 공부를 시작했다. 미혼모가 되면서 학업을 포기했던 그녀는 두리홈에 입소하면서 꿈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검정고시 합격 후, 하람이를 당당히 키우고 싶었던 박 씨는 회계 관련 자격증에 도전했다.
하람이를 홀로 재워가며 밤새 공부한 노력 끝에 박 씨는 회계 관련 자격증을 7개나 취득했다. 그리고 세무서에 입사해 누구보다 떳떳이 하람이를 키우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20세에 임대 아파트에 당첨되어 두리홈을 퇴소했다.

▲ 두리맘들이 두리홈에서 함께 명절음식을 만들고 있다. <사진=두리홈 제공>
두리홈은 미혼모자(母子)를 위한 공동 생활시설이기도 하지만 대안학교가 되기도 한다. 또 최근 시설을 새롭게 리모델링 해 두리홈 엄마와 아기들이 더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추남숙 원장은 “엄마와 아기가 행복한 편리한 공간을 위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후원과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며 “아직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지만 관심을 가지고 후원해주시는 덕분에 임산부 쉼터, 공부방, 도서관, 공동 양육실 등을 마련했다”고 전했다.

두리홈이 미혼모의 자립을 돕는 이유는 당연하다. 추남숙 원장은 “내면이 상처로 가득한 미혼모들은 정서적인 밑받침이 거의 없다. 가족이 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하소연을 하겠지만 미혼모들은 옆에 있는 아이에게 100% 하소연하게 된다. 이는 아이의 인성에도 잘못된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설명했다. 또 “미혼모가 자신의 상황을 아이에게 책임을 묻고 자포자기 하게 되면 미혼모는 대물림되고 미혼모 재범만 늘어날 뿐”이라며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기초적으로 미혼모가 자립할 수 있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두리홈에서는 다양한 자립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학업을 원하면 장학재단과 연계해 1대1 혹은 그룹 수업을 진행한다. 이 외에 제과제빵, 이미용 등 직업교육도 이뤄진다. 대표적인 사례로 ‘엔젤스토리’가 있다. 또 삼성카드와 연계해 키즈카페를 준비 중이다. 키즈카페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실내시설과 미혼모들이 일 할 수 있는 일터로 마련될 예정이다.

▲ 새롭게 리모델링 된 두리홈의 어린이 도서관. 누구나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 이외에도 아이들의 수면 공간, 엄마들을 위한 공부방, 멀티미디어실 등 편리하고 다양한 시설이 갖춰져 있다. <사진=두리홈 제공>

예배를 통해서도 훈련이 이뤄진다. 바로 ‘사랑해’ 학습이다. 두리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미혼모들은 삶 속에 예배가 심어진다. 삶이 예배로 변화된 두리맘들은 다양한 교회 활동으로 여가 생활도 함께 즐기며 하나의 가족으로 변해간다.

“1명의 미혼모를 자립시키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뛰어듭니다. 나중 된 영혼을 생각해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 보듬어 준다면 10대의 미혼모들이 건강한 성인으로, 아이와 함께 건강한 가정을 꾸릴 것입니다. 5개월 뒤 또 여기 오게 되는 걸 막아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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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핀으로 자선냄비 펄펄 끓이는 ‘레드마마’

지난달 27일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2013 구세군 자선냄비 시종식 현장에는 다양한 부대행사가 함께 열렸다. 그 중 하나인 미혼모 자립 지원 프로그램인 ‘레드마마’ 캠페인도 함께 시작을 알렸다.
오는 25일 성탄절까지 열리는 레드마마는 휘슬러코리아의 지원으로 구세군 두리홈 소속 미혼모들이 시민들에게 빨강 머핀과 수프를 무료로 제공하며 자율적인 구세군 자선냄비 기부를 독려한다.
레드마마 캠페인은 두리홈 소속 미혼모들을 대상으로 희망자에 한해 다양한 재능 발굴에서부터 점포 리모델링, 마케팅, 고객 관리 등 전반에 걸친 비즈니스 멘토링을 지원하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이다.
레드마마에서는 구세군 자선냄비 10년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팝업 전시관’과 ‘포토존’도 함께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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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세군 두리홈에 다녀간 두리맘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아낸 에세이집. 사연 하나하나에 아픔보다는 행복이 묻어난다.
소녀를 포기하고 엄마를 선택한 미혼모 이야기 너도 꽃, 이제 피는 거야

원수 같은 왕자님과 못난이 공주

아직도 기억이 나요. 17살의 웃는 법을 모르는, 사랑의 울타리가 없는 외톨이의 삶.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날 사랑하지 않는 엄마, 나를 사랑하는 아빠를 떠나 많은 방황 끝에 나를 구원하려, 내 곪디 곪은 아픔들을 가슴깊이 묻어둔 채 나는 가시투성이인 울타리 밖으로 발걸음울 내딛었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던 나날들. 하루하루가 외로웠어요. 우리 집은 한마디로 전쟁터였으니까요.

엄마의 수없는 외도와 부모님의 불화, 그 속에서 하염없이 방황하던 나. 한 번만 더 나를 봐주길, 따듯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던 나는 불량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사춘기의 방황이 아닌, 관심 받고 싶어 더 삐뚤게 나가던 나는 청개구리였어요. 어린 나이에 술을 밥 먹듯 마시며, 담배를 멋으로 피웠던 어리석은 그 시절. 지금은 지우개로 지우고 싶은 나의 지난 시간들입니다.

남들처럼 살고 싶었고, 지독한 가난이 싫었습니다. 반복되는 고달픈 생활에 지쳐버린 엄마는 밖으로 돌기 시작했고, 조금 더 참고 악착같이 살아보려고 했던 아버지도 결국 엄마의 손을 놓아버리셨습니다. 사람의 온기 하나 없는 차디찬 가정이 싫었고,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현관문을 도저히 열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집을 떠났습니다. 눈이 떠지지 않기를 바라며 울며 지새웠던 나날들, 나의 환경을 탓하고 애꿎은 부모님을 원망하며 모질게 부정하던 날들. 그땐 그 날들이 이토록 그리워질 줄 미처 몰랐습니다.

17살의 소녀는 방황을 시작했습니다. 아무 목적 없이 노는 게 좋았고, 지독하게 외로운 희망 없는 미래가 오히려 편하기까지 했습니다. 어쩌면 사랑받고 싶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죠. 텅 빈 주머니와 공허한 마음. 내가 바란 건 그저 따듯한 관심이었는데, 방황하는 나에게 말 한마디 건네주지 않는 세상. 날 보는 모든 사람들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웠습니다. 그렇게 점점 무너져가는 내 모습을 보고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세상이 지옥처럼 뜨거워 괴로운 게 아니라 미친 듯이 차가워 괴로웠습니다.

쓰레기 같은 삶이 계속되던 유난히 추웠던 그 해 겨울, 드디어 좋은 사장님을 만나 식당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 사람을 만났습니다. 꼬질꼬질한 배달부 아르바이트생. 그래도 잘 생기고 키가 훤칠했던 그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하던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나의 웃는 모습이 제일 예쁘고 내 상처를 안아주고 싶다는 사람. 나와 모든 환경이 닮은 그 사람이 좋았습니다. 18살, 19살, 아직은 너무 어린나이지만 서로 이겨내며 열심히 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린 너무 어렸습니다. 사랑을 주는 법도, 받는 법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저 안고만 있는 것이 사랑인 줄 착각하고 지냈죠. 사랑이 너무 받고 싶어 어쩌면 남들과 다른 방법으로 사랑을 더 갈구한 것일지도 몰라요.

틀려버린 사랑 끝에 천사가 내 몸 속에 아주 슬픈 선물로 찾아왔습니다. 부정하며 아닐 거라고, 아닐 거라고, 가엾은 우리 천사 왜 하필 나에게 찾아왔냐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실감나지 않았어요. 천사에게 잘 할 자신이 없었어요. 하지만 한편 비겁한 변명으로 아이를 부정하면 안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교복 입은 아이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행여 지각할세라 헐레벌떡 뛰어가는 학생들의 모습도 부러웠고, 친구들의 시시콜콜한 학교 얘기들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불투명한 나의 미래, 빛줄기 하나 없는 캄캄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지만 아이를 위해 독하게 마음 먹었습니다.

힘들었던 시간,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두리홈 식구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먼저 안아주고 손잡아주던 사람들, 또다른 사랑의 단어를 깨닫게 해준 고마운 사람들. 나를 선입견 없이 진실된 눈으로 봐주던 소중한 내 사람들. 전 그곳에서 이 가슴울림이, 지금 이 눈물이 비로소 행복이란 걸 알게 되었고 그 희망을 믿게 되었습니다.

2009년 천사가 나의 품에 안겼습니다. 텅 빈 병실에 꽃 한 다발 없고, 수고했다는 따듯한 말 한마디 듣지 못했지만 눈물나게 기뻤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너무 고마워 목 놓아 울어버렸어요. 비록 나도 너처럼 갓난이 엄마지만, 널 만나 나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고맙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그렇게 하루, 이틀 내 아이가 커 가는 걸 보며 웃는 법을 모르던 17살 천방지축 소녀가 18살의 철부지 엄마가 되어 활짝 웃게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아이가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흔한 아르바이트 하나 구할 수 없었고, 정부의 도움을 받고자 했지만, 결국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이라곤 10만 원, 아이를 키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습니다.

이력서를 쓸 때마다 중졸이란 창피한 학력 칸을 바라보며, 이대론 안 되겠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갓 4개월 된 아이를 놀이방에 맡기고 잠시 놓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죠. 생활비를 벌기 이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바쁘게 살았습니다. 내가 힘들게 번 돈으로, 비싸고 좋은 걸 먹이고 입힐 순 없었지만, 그래도 부족함 없이 키울 수 있다는 뿌듯함이 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두리홈에서 나왔습니다. 더 캄캄한 현실에 부딪혔지만, 후회하기 싫어 하루 3시간씩 자며 닥치는대로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 손을 벗어나 남의 손에 익숙해져버린 아이를 보며 가슴이 아팠어요. 행여 이 아이가 커서 날 원망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도 되었습니다. 날 원망하는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엄마가 너를 위해 그런 거야’란 말 밖에 없을텐데..... 아이가 이럴 거면 뭐 하러 낳았냐는 가시 박힌 소리를 할까봐 무서웠고 미안했지만 그럴수록 더 독하게 마음먹고 더 강하게 키웠어요. 그렇게 열심히 산 덕분인지 지금은 아이와 함께 살 보금자리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이를 낳고 변화된 내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 아빠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절 보고 감동했나봐요. 그동안 무슨 깡인지 내 아이 내가 지키겠단 생각이 가득해서 한 번도 그 사람을 원망하고 닦달하지 않았어요. 행여 내가 이 사람을 부정하고 원망하면 한때의 뜨겁던 우리 사랑을 부정해야 되고, 결국 그 결실인 우리 아이를 부정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죽도록 미웠지만 아이의 아빠니까 용서했어요.
나를 차갑게 외면하던 그 사람이 처음으로 아이를 보러 왔을 때, 자기와 꼭 닮은 아이를 보며 미안하다며 울더군요. 전 이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우리 아이에게 한 부모 밑에서 자라야 하는 아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돌고 돌아 힘들게 만난 이 사람을 다시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남편은 곧 군에 입대합니다. 그 전까지 남편은 한 달 내내 쉬는 날 없이 꼬박 일을 합니다. “일 좀 그만해. 몸 좀 보라고. 그 정도 못 번다고 못 사는 거 아냐!”라고 호통을 치면 신랑은 “나 군대 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기회 있을 때 벌어야지. 너 고생 안 시킬거야”라고 대답합니다.

지금 사는 집 월세에, 생활비, 적금, 공과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어 가끔 울컥할 때가 많아요. 하지만 내가 지금 여기서 흐트러져 버리면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인지 드디어 방 2칸이 있는 곳으로 평수를 넓혀 이사 갑니다. 비록 월세지만 행복합니다.

제 글은 해피엔딩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떠오르고 느꼈던 아픔과 슬픈 기억이 모두 좋은 추억으로 변했습니다. 정말 간절히 바라는 건 이루어집니다.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간절함은 또 다른 기다림이란 거 잊지 마세요. ‘용서’란 말은 쉽지만 ‘용서하기’보다 어려운 건 없는 거 같아요. 용서하고 아름답게 사랑하세요. 아름답게 사랑하고 용서하세요. 그럼 진정한 행복이란 게 뭔지 가슴 깊은 곳에서 알게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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