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특선동화] 형제의 쌍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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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특선동화] 형제의 쌍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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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2.1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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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설레임, 한국전쟁에 전부를 바친 캐나다 형제들

“형님, 우리 형제는 어떤 경우에라도 평생 동안 이렇게 같이 살아요.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나란히 같이 묻히자구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작은 시골 마을인 이그나스(IGNAS)에서는 아기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날을 기다리며 모두들 설레이는 마음으로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사이좋게 자란 6남매 중 첫째와 둘째인 조셉과 아치 형제는 오늘도 건너편에 보이는 산위의 하얀 눈을 바라보면서 정답게 이야기꽃을 피우며 깊은 우애를 다졌습니다.

“그래, 이 형도 네 마음과 같은 생각이란다. 아름다운 숲과 맑은 물, 그리고 정겨운 이웃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우리 마을이 난 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곳으로 생각하거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너랑 함께 살 거야”
“좋아요. 형님 생각도 제 생각과 갔다는 것을 확인 했으니 이 약속은 꼭 지켜야 해요.”
“그래 너나 약속 잘 지켜라. 갑자기 도회지 바람이라도 나서 시골에서는 도저히 답답해서 살 수 없다고 혼자서 이 형을 버리고 어디론지 훌쩍 떠나지나 말아라.”
“글쎄 형님과 나는 죽음까지라도 결코 갈라놓지 못한다니까요.”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의 동생인 아치는 누구보다도 정의감이 뛰어나고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냥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맏형인 조셉은 매사에 세심하며 신중한 성격으로 다섯 동생들을 부모처럼 보살피는 마음이 지극했습니다.

조셉과 아치 형제가 살고 있는 이그나스 마을은 전체인구가 겨우 350여 명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모두 일가나 친척보다 더 가깝게 지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 갑자기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 것은 1950년 7월이 되어서부터입니다.

“코리아라는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나라지?"

마을일을 책임진 이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세계지도를 펴 놓고 코리아를 찾기 위해 허둥대고 있었습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아주 조그만 나라라고 하던데.”
“그래 여기 있구먼, 토끼처럼 생긴 것 같은데 너무나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아.”
“글쎄 이곳에서 지난 6월 25일 새벽부터 전쟁이 일어났다는 거야.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공이 합세해서 남쪽에 있는 코리아를 북쪽에 있는 코리아가 침략을 해서 지금 전 세계인이 분노한 가운데 유엔군이 즉각 참전키로 했다는 소식이야.”
“안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와는 특별한 관계가 있지는 않으니 그렇게까지 걱정할 것까지는 없잖아.”
“아니야,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이 코리아를 돕기 위해 특별부대를 새로 창설해서 지원하기로 결정 했어. 그리고 전국적으로 지원병을 모집하고 있어.”

이장은 다음날 마을사람들을 전부 모아놓고 6.25 한국전쟁에 대한 사실을 설명한 후 지원병을 모집하고 있으니 젊은 청년들은 이름도 위치도 잘 모르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이지만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사명감으로 지원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동생 아치는 가슴이 콩닥거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두 형제의 사랑 ‘한국전쟁’에
아무런 대책도 준비도 없는 일요일 새벽을 기해 탱크를 앞 새우고 기습남침을 했다는 공산군들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힘없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가는 한국인들이 한없이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그래 내 젊음을 세계평화를 위해 바치는 것도 조상들께나 우리 가문에 커다란 영광이야.’

이렇게 생각한 아치는 다니고 있던 철도청에 사표를 내고 누구하고 상의할 겨를조차 없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새로 창설되는 특별부대에 지원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캐나다에서는 총 2만 8천 명의 군인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인데 전쟁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1951년도에는 캐나다군인의 약 절반이나 한국에 파견되어 피 흘리며 싸워주었습니다.

“아우야, 너 혼자 이렇게 훌쩍 고향을 떠나버리면 난 어떻게 하라는 거냐?”

맏형인 조셉은 동생인 아치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형님, 제가 이렇게 형님 곁을 잠시 떠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곳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어서 불쌍한 코리아를 위해 달려갑니다.”
“그래 아우야, 집안일일랑 아무 걱정 말고 자유를 위해 잘 싸우고 건강한 몸으로 돌아오너라.”

두 형제는 서로 부등켜 안고 눈물로 작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형 조셉은 동생 아치가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떠난 날부터는 밤이 되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설령 잠이 들어도 동생이 어려움에 처해있으면서 형님을 애타게 부르는 악몽만 꾸는 바람에 가슴이 벌렁거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에서 안정되고 좋은 직장인 철도청에 근무하던 조셉은 한국전쟁에 지원하여 나간 동생 아치의 소식만을 기다렸으나 가부간에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어 걱정이 이만 저만 아니었습니다.

‘나만 이렇게 평안하게 보낼 수는 없어 지금 내 사랑하는 동생이 이름도 알지 못하는 코리아 전쟁터에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를 알 수 없는 처지인데….’

동생을 가까이서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책임감 때문에 더 이상 이대로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한 형 조셉도 동생이 떠난지 3개월 후에 급기야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지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3개월 먼저 한국으로 떠난 동생을 찾아 형인 조셉이 한국에 와서 동생과 같은 부대에 배속이 된 날, 이날따라 경기도 가평에서는 중공군과의 사상 최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10월의 쌀쌀한 날씨에 눈앞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뿌연 안개 속에서 낮도 밤도 없이 계속되는 가평전투는 캐나다 군과 중공군과의 일전일퇴의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그런데 동생 아치의 소식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만 형 조셉은 23살의 젊은 나이로 중공군의 총탄에 맞아 장열하게 생애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같은 부대에 소속되었으면서도 치열한 전투로 인해 서로가 생사를 확인조차 못한 채 동생을 보호하겠다고 3개월 늦게 자원입대한 형은 그만 사랑하는 동생을 지척에 두고도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먼저 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비 오듯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중공군들과 함께 싸웠던 형제는 이렇게 서로의 운명을 달리 해야 했고 동생을 만나지도 못한 채 싸늘한 시체가 된 형과 그 형의 주검을 수만리 떨어진 이국 땅 전쟁터에서 발견 한 동생 아치의 충격은 산천이 떠나갈듯 한 통곡 소리로 메아리칠 뿐이었습니다.

형 먼저 보낸 동생의 소원
사랑하는 형 조셉의 유해는 부산에 있는 UN기념공원에 안장되었지만 1955년 군에서 명예제대 후 아내와 함께 외동딸과 철도기술자로 생활해온 동생 아치는 한국전쟁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형님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살아서는 물론이요 죽어서라도 늘 함께 있자고 철석같이 약속했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사랑하는 형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속에서 전쟁 후유증 스트레스 장애를 앓았습니다.

“여보 이젠 마음을 좀 편하게 가지세요.”

아내인 아그네스의 위로도 외동딸인 데비의 재롱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지난 2009년도에는 한국에 묻혀있는 형의 묘소를 찾고 싶었지만 몸이 안 좋아 딸을 대신 보내 형의 묘소를 다녀오게 하고 사진을 통해 대신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이 애비의 소원을 하나 들어줄래?”

어느 날 아치는 외동딸 데비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무슨 소원이든지 말씀하세요.”
“나에게는 꼭 두 가지 소원이 있단다. 하나는 내가 목숨 바쳐 싸웠던 한국군 지원부대의 심벌마크를 사랑하는 너의 왼쪽 팔에 문신으로 새겨 영원히 남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죽거들랑 내 유해를 한국의 부산 UN기념공원의 형님 옆에 묻는 것이란다.”

아치의 외동딸인 데비는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곧 바로 자기 왼쪽 팔에 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부대의 심벌마크를 문신으로 새겨 넣었습니다.

“아버지의 소원가운데 한 가지는 제가 이루어드렸고요, 남은 한 가지도 꼭 이루어 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 건강을 회복하세요.”

다부진 외동딸 데비의 모습을 보며 두 눈에 눈물이 고인 아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형님에 대한 죄책감과 전쟁 후유증 스트레스로 고생하던 아치는 2011년 6월 마침내 형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긴 채 82살로 한 많은 생애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유해를 큰 아버지가 누워계시는 한국에 나란히 묻어드려야만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외동딸 데비는 아버지의 뼛가루 유구함을 땅에 묻지 못한 채 그대로 거실에 모셔놓았습니다.

‘아버지,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더 참으세요. 제가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의 유골을 큰 아버지 곁에 나란히 누워계시도록 해드릴께요.’

거실에 모셔둔 아버지의 유구함을 바라볼 때 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다짐해온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부산의 UN기념공원에 묻혀 있는 형 조셉의 무덤 옆에는 한국 법규상 부인만이 합장 될 수 있기 때문에 동생 아치가 함께 묻힌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져 한국의 KBS스페셜 프로에 소개되자 캐나다 한국전 전우회서는 이 일을 위해 아치의 딸이 한국행에 따른 경비마련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목숨 걸고 한국전쟁에서 싸웠던 전우의 일인데 우리가 앞장서야지….”
“그렇고말고 유골이라도 사랑하는 형님 곁에서 쉬도록 해 드려야지”

결정적으로 캐나다 연방의회 상원으로 있는 한국교포 김연아 의원을 만나서 이러한 사연을 이야기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소중한 일이 꼭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 해봅시다.”

아치의 딸인 데비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위로한 뒤 장문의 사연을 담은 공식문건을 작성하여 한국의 보훈처로 보내는 등 모든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동안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김연아 위원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61년만에 한국땅 함께 묻혀
“데비씨 기뻐해주세요. 아버지의 유골을 고인이 바랬던 바와 같이 큰 아버지 옆에 나란히 묻힐 수 있도록 한국정부의 허락이 났습니다.”

김연아 의원 역시 평안남도가 고향이셨던 자신의 아버지가 멀고 먼 이국 땅 캐나다에 뭍혀 계시기에 누구보다도 그 애달픈 심정을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아버지의 두 번째 소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유골함을 들고 한국으로 떠나는 외동딸에게 노쇠한 아치의 부인인 아그네스는 이렇게 전화를 통해 딸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울고 있니? 나는 울지 않을 거다. 사랑한다. 잘 다녀오너라.”

아치의 유골함을 안고 달려온 캐나다 발 한국행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 인천국제공항에는 각별히 예의를 갖춘 한국군 사열단과 같이 온 캐나다 참전용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태극기와 캐나다 국기의 펄럭임 속에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UN기념공원의 한 쪽에 자리 잡은 조셉과 아치 두 형제의 선명한 묘비명 아래 묻힌 유골은 헤어진 지 61년 만에 한국 땅에서 다시 만나 사랑하는 딸과 손자들이 뿌려준 흙으로 이불삼아 고이 잠들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괴로워 하셨던 아버지께서 이제야 편히 쉬실 수 있게 됐네요, 뭔가 꿈만 같습니다.”

아치의 외동 딸 데비 허시의 왼쪽 팔뚝에 새겨진 캐나다 한국전쟁 참전 부대의 심벌마크도 덩달아 활짝 웃는 것 같았습니다.

◀ 김철수 아동문학가. 월간아동문학 신인상 동화당선으로 등단해 다양한 수상 경력이 있다. 현재 국제PEN클럽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한국기독교문인협회 이사직과, 한국장로문인회,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국제아동문학작가협회 회장, 아름다운신문 기독타임스 사장, 美 솔로몬대 한국학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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