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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하철 참사 5일째. 엄숙한 분위기마저 감도는 대구 시내는 온통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검정색 글씨의 플래그카드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왼쪽 가슴에는 조그만 검정색 기가 달려있었다.
전날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발이 제법 굵어진 22일 사고현장이 유가족들에게 공개됐다. 플랫폼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유가족들의 울음소리는 한계단 한계단 발을 옮길수록 통곡으로, 울부짖음으로 변해갔다.
역내로 진입하면서부터 코를 찌르던 매캐한 유독가스는 사고현장에 이르자 절정에 달해 숨 쉬기조차 곤란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에게 공개된 현장은 한다미로 ꡐ처참함ꡑ 그 자체였다. 유가족들은 한없는 아쉬움으로 난도질 당한 가슴을 부여잡고 울고 또 울었다.
아, 하나님...
ꡒ오빠, 엄마 어디 있겠노? 엄마 어디 있겠노?ꡓ 지난 22일 오전 닷새만에 사고현장을 찾은 유족들의 눈에 들어온 모습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사방벽, 녹아내린 철골 구조물, 타다만 신발 한짝. 처참한 사고현장은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하고 말았다.
소리내어 엉엉 우는 사람, 멍하니 레일 위만 바라보는 사람,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우는 사람, 녹아버린 쇠기둥을 부여잡고 얼굴을 비비며 우는 사람, 죽은 딸의 유품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삼키는 어머니, 너무 울어 의식을 잃은 사람….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느끼기 위해 현장을 찾은 딸은 오빠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연신 ꡒ오빠 엄마 어디 있겠노?ꡓ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동생을 바라보던 오빠도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계단을 올라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 옆에는 4명의 여중생들이 아무말 없이 ꡐ주루룩ꡑ 눈물을 흘리며 레일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할 말도 잃었나 보다. 이들은 전학온 지 17일 만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친구 정윤(15․여)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와 넋을 잃고 말았다.
친구 단비는 ꡒ문만 열어줬어도…ꡓ라며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다가 ꡒ정윤이가 좋은 곳에 갔으면 좋겠고 혹시라도 살아 돌아오면 진짜 잘해줄건데, 가슴이 아파 죽겠다ꡓ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슬이 또한 ꡒ조금만 전학을 늦게 왔어도 살 수 있었는데 너무 안타깝다ꡓ며 옷소매를 적셨다.
한편 중앙역 위 지상에는 비가오는 궂은 날씨에도 사고 당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몇 개의 나무와 비닐로 비를 피할수 있게 마련된 2평 가량의 추모 장소에는 수 십개의 촛불과 추모 인파들로 항상 가득 메워졌다. 촛불 사이사이에는 귤, 초코파이, 음료수 등도 함께 놓여져 추모자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한 모자는 촛불에 불을 붙여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 놓은 다음 쪼그리고 앉아 함께 기도를 했고 어느 부부는 20여 분 동안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안타까움과 슬픔은 대구 시민회관 2층의 합동분향소도 마찬가지. 사방이 하얀 국화꽃으로 뒤덮인 분향소는 조문객들의 발걸음 소리 혹은 흐느끼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유가족들의 무거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특히 지난 1995년 지하철 폭파사고로 많은 선배들을 잃은 영남중학교(교장:김명기) 학생대표단 10명이 고인들의 명복을 빌때는 엄숙하기까지 했다.
또 분향소 우측에 상주들을 위해 가로 5m, 세로 10m, 두께 1㎝ 가량의 얇은 스티로폼으로 시멘트 바닥의 찬기운이 그대로 느껴지게 만들어진 자리에는 얇은 홑이불, 식수 몇 병 그리고 주인없은 슬리퍼가 쓸쓸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시민회관 1층 실종자 유가족 대기실. 조그만 공간에 수 십명이 모여 있었다. 간혹 한숨 소리만 들릴뿐 쥐죽은듯 조용했다. 그순간 3명이 대기실로 들어왔고 앉아있던 한 노인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두 손을 내밀며 일어서서 다가왔다.
ꡒ언니 우짜꼬, 우짜면 좋노…ꡓ 실종된 남동생을 생각하며 두 노자매는 얼싸 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한동안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저나왔다.
실종된 동생 소식을 기다리다 지쳤는지 동생의 사진을 머리 맡에 둔 채 곤히 잠든 오빠, 신문에 실린 사고 전철 사진을 가리키며 안타까워 하는 가족들, 친구를 찾기 위해 환자가 있는 병원은 다 돌아다니다 결국 찾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대기실로 돌아온 대학생들. 이들 모두의 얼굴에는 ꡐ시신만이라도 찾았으면ꡑ 하는 간절함과 기다림이 배어있었다.
지난 21일 저녁 대구시내를 들어설 때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서울로 돌아가는 22일 오후에는 제법 굵어졌다.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절망적이지도 않았다.
구세군, 기독교연합봉사단을 비롯해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봉사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품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뼈 속 깊이 사무친 슬픔을 함께 하고 있었다.
지금 내리는 이 비가 대구의 모든 슬픔을 씻어 다시는 큰 슬픔이 대구 땅 위에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font size="3" color="00CC00ꡒ>대구=이승국기자(sklee@uc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