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의로움도 하나님의 선물 …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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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로움도 하나님의 선물 …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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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1.05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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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 496주년 특별기고 (하) -어거스틴과 종교개혁

▲ 인간의 삶을 조정하는 운명의 바퀴, 운명의 지배 같은 고전적 관념들을 찬양하면서 르네상스 지도자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부흥시키고자 했다.
▲ 박영실 교수(총신대학교, 역사신학)
종교개혁 후 거의 5세기가 지났다. 오백년 전의 종교개혁의 봉화는 루터의 95개조항의 면죄부항목이 대변하듯이 힘차게 타오를 수 있었던 불쏘시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구교의 도덕적 타락이었다.

하지만 개혁가들의 후예들인 개신교도들이 구교도들에 대해서 도덕적 우위를 주장할 수 없는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종교개혁’이란 이슈는 만감이 교차할 수 있는 주제라 할 수 있다. 오백년된 이 종교개혁이란 고화(古畵)가 정작 묘사하는 바는 무엇인지? 16세기 종교개혁은 윤리적인 이슈를 넘어서 신학적인 사안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 개혁의 명분은 ‘진리의 회복’이자 ‘구원론의 갱신’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곧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를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구원론적인 진술이 교회의 신학자 어거스틴에게서는 ‘죄와 은혜’의 구도에서 이뤄지고, 종교개혁자들 특히 루터와 칼빈에게서는 강조점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혹자들은 2000년의 기독교 역사는 어거스틴 신학의 각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런 논평은 얼마간 과장일 수는 있지만 거기에 담긴 진실은 어거스틴은 기독교 신학의 정통으로 간주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어거스틴 신학의 가장 근본적인 도식은 ‘죄와 은혜’이다. 그 도식은 그 출생의 구도에서부터 추적되어야 한다. 북아프리카 타카스테에서 태어난 어거스틴의 부친은 파트리키우스요, 그의 모친은 모니카이다.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록에서 보여준 성황은 부친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한다. 그런가 하면, 모친의 경우는 과도하게 칭송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그들의 아들 어거스틴에게서 육감적인 이교도였던 부친은 죄의 표상으로, 그런가하면 참으로 경건한 기독교인었던 모친은 은혜의 자리를 대표한 듯하다.

회심 후 히포의 감독으로 사역하였던 어거스틴은 수행했던 가장 힘겨운 싸움은 펠라기안들과의 논쟁이었다. 금욕적인 수도사로 알려진 펠라기우스는 선천적으로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죄악이 실제적인 것이었다면 펠라기우스에게도 인간에게 선행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전통신학의 원류로 평가받는 것을 볼 때, 어거스틴의 주장이 더욱 인간의 현실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평가를 교회로부터 얻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 펠라기우스 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신학적인 구도인 죄와 은혜를 기독교의 본질로 천명하게 된다. 그는 이 펠라기우스 논쟁을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에 해답을 제시한 것이다.

플라톤은 적어도 어거스틴에게는 몽학선생이었다. 그를 통해서 어거스틴은 진정한 존재는 불가시적이라야 한다는 명제를 체득한 것이다. 이제 기독교의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젠 모든 준비가 다 끝난 듯 한데도 정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의 결단은 이뤄지지 않는다. “지금이 아니고 내일이야!”라는 심적 고뇌를 맛보면서 지식과 의지와의 괴리를 인식하게 된다. 386년 8월 어느 날 “톨레레게 톨레레게(들어서 읽어라, 들어서 읽어라)” 동요 소리로 인해서 그 즈음 읽고 있었던 바울 서신을 펼쳐 들었다.

롬 13: 12-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 말씀이 눈에 들어오자, “내 마음 속에 확신을 주는 빛으로 인하여, 모든 의심의 어두움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은총의 사건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로의 헌신이자 동시에 바울의 다메섹의 회심과 같은 것이었다. 한 개인의 개종이자 한 시대의 회심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어거스틴은 예수 그리스도 - 바울의 바통을 이은 것이다.

어거스틴에게서 인간의 의롭다 하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은혜는 성령의 역사로 나타난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말년에 저술한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라는 저술에서 선택은 믿음보다도 앞선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어거스틴의 이러한 사상은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어거스틴 수도회에 들어감으로써 자연스럽게 수용되었으리라 이뤄졌으리라고 본다. 루터의 생애 전환은 롬 1:17과 더불어 나타난다. 하지만 그에게 우선적으로 부딪쳤던 말씀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이 아니라 앞 부분에서 등장한 ‘하나님의 의’였다. 그것은 본래 루터에게는 심판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의였으나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의인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용서의 은혜을 오직 믿기만 하면 주신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 사상을 바울의 롬 1;17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의 ‘영과 문자’에서도 확인하였다.

루터의 신학은 오직 ‘십자가의 신학’이다. 십자가의 은총을 믿을 때에만이 구원이 이뤄진다. 루터의 회심 사건은 탑에 있었던 그의 서재에서 일어났다 해서 ‘탑의 경험’이라고 한다. 탑의 경험에서 그는 고백하기를, 의롭다 하심의 은총은 법적이고 우리 밖에서 그리고 주입되는 은총인 것이다. 루터의 성화론은 상대적으로 약하긴 하지만 간간이 나타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만 (sola fide) 의롭다 하심(justification by faith)얻는다는 교리를 발전시켰다.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은 루터와는 달랐다.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의 시대적인 맥락에 서 있다. 르네상스의 정신은 “근원으로 돌아가자”(ad fondes)였다. 칼빈에게 있어서 근원은 사도들의 저술인 성경이었고, 또한 교부들이었다. 칼빈에게는 그 교부 중의 교부가 바로 어거스틴이었던 것이다. 사실 칼빈은 루터와는 달리 어거스틴 수도회에 속하지 않았지만 어거스틴의 신학적 영향은 막대했다. 칼빈 역시 어거스틴처럼 하나님의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전적 타락이요 전적 무능력이기에 구원에서의 인간의 노력이 배제된 하나님의 주도권이 강조된다. 마치 토기장이가 한 그릇은 귀하게 한 그릇은 천하게 자신의 뜻을 따라 만든다고 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기독교 강요를 설펴보면, 칼빈은 예정론보다 성화론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부어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칼빈은 율법의 죄를 깨닫게 한다는 루터와는 달리 성화와 관련하여 율법의 제3의 용법을 강조하고 있다. 예정과 성화를 강조하는 칼빈의 사상은 모두 어거스틴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칼빈은 어거스틴처럼 원죄 교리를 확신한다.

요약하자면, 대체로 역사가들은 16세기의 개신교 종교 개혁을 어거스틴 운동의 부흥으로 인식해왔다. 어거스틴을 종교개혁 시대 신학의 주요 주제와 강조점의 원천으로 인식해온 것이다.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과 같은 주류 종교개혁자들 간에 신학적 차이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간에는 죄와 은혜 그리고 선택 교리에서 분명히 공유된 신학적 기반이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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