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이란 이름으로 인간윤리 속에 신앙 융해시켜선 안돼”
상태바
“인권이란 이름으로 인간윤리 속에 신앙 융해시켜선 안돼”
  • 운영자
  • 승인 2013.10.22 21: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형민 교수 (호남신대)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는 윤리적 기준은 일반인에 비해 높은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기독교인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을 때 비난여론이 더욱 크게 작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국기독교학회는 지난 18일부터 19일 양일간 ‘정의와 평화’라는 주제로 제42차 정기학술대회를 열었다. 국내 유수 신학회의 신학자들이 나서 여러 가지 목소리를 냈다. 그 중 ‘사회윤리’를 다룬 발제자들의 주장을 요약해 실었다. <편집자 주>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에큐메니즘의 과제와 목적에 따라 두 차원의 영역에서 논의되어 왔다.

첫째는 ‘수평적 차원’으로, 인류공동체 안에서 증거와 봉사를 통해 교회의 공동체성을 형성하려는 노력이다. 이는 더 나은 의와 평화를 실천하기 위한 사회윤리적 봉사로서 ‘정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즘’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이러한 운동은 ‘삶과 봉사’가 전담해왔다. 삶과 봉사는 1925년 스톡홀름에서 개최되었던 ‘실천적 그리스도교 운동’에서 시작되었는데, 제1차 에큐메니칼 회의인 니케아 공의회(325년)가 있은 지 1600년 되는 해 열렸다고 해서 ‘윤리의 니케아 공의회’라고도 불린다. 스톡홀름 회의에서 ‘교회는 분열시키지만 봉사는 연합케 한다’는 에큐메니칼 사회론의 기본원칙이 공표되었다. 하지만 이는 오늘날까지 많은 오해와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둘째는 에큐메니즘의 ‘수직적 차원’이다. 이는 신앙의 차이를 극복하고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이루기 위한 노력으로 ‘통일성을 추구하는 에큐메니즘’이라고 하겠다. 주로 신앙과 직제가 주관하였다. 1948년 ‘신앙과 직제’위원회는 ‘삶과 봉사’위원회와 연합해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를 창설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자신의 입장을 바꿨다. 1965년 공의회 중 발표된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이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이 교령은 ‘분리’를 뜻하는 라틴어를 ‘분할’을 뜻하는 단어로 대치하고, 신교의 교회공동체를 로마 가톨릭교회와 갈리진 신앙공동체로 규정했다.

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총회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라는 주제를 제시했다. 부산총회의 주제를 분석해 볼때, 에큐메니칼 골동체의 실천적 과제는 ‘정의와 평화’이며, 그리스도 공동체에게 이를 명하시는 주체는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20세기 위대한 발견이며 사건이다. 그러나 이는 한 번에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이는 대화의 과정이요 이해와 합리의 과정이다. 에큐메니칼 파트너들이 이러한 과정에 참여함으로 타자 가운데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이해하게 된다.

본 연구를 통해 에큐메니칼 윤리 속 두 물줄기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하나는 구조적 불의를 극복하고 모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제도적 장치를 통해 보보하려는 ‘정치중심적’ 혹은 ‘구조중심적 윤리’다. 다른 하나는 불법행위로 인해 고난 받고 아파하는 희생자의 입장에 서서 이들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도우려는 ‘민중중심적 윤리’다. 전자가 인권사상을 계몽의 열매로 본다면 후자는 해방의 열매로 본다.

1945년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된 이후 세계사회의 인권논의는 주로 정치중심적 지향성에 따라 주도되고 있음이 분면하다. 그러나 인권에 대한 의식과 뿌리가 불법으로 고난과 아픔을 당했고 지금도 당하고 있는 민중의 삶과 경험에서 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두 흐름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적인 불의와 억압과 가난으로 고통 받는 자들의 아픔을 법과 제도를 통해 보호하려는 통합의 전략이어야 한다. 에큐메니칼 공동체는 단기적 전략과 장기적 전략으로 나누어 두 가지 운동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에큐메니칼 공동체는 다원적이고 복잡한 사회 속에서 이웃의 권리를 자신의 권리와 동일하게 고려하기 위한 자기 제한적 법의식이 필요하다. 인권은 지구적 체제 안에 있는 저항적이며 인류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미래를 가능케 하는 요소이다. 오늘날 실용적 사실주의와 해방지향적 에큐메니즘 사이에 긴장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에큐메니칼 공동체는 협의체적 과정을 통해 이 둘 사이를 중재하고 변용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인권론이 주의해야할 신학적이며 사회윤리적 태도가 있다. 먼저 현대 인권선교가 과거의 그리스도교 선교의 연장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리스도 공동체의 지구적 인권운동이 세속적 인권선교의 한 형태로 오해되어서도 안 된다. 둘째, 에큐메니칼 공동체가 인간의 윤리적 능력을 과신해서도 안 된다. 인권의 이름으로 신앙을 인간의 윤리 속에 융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