쯔빙글리 신학의 중점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가르침

운영자l승인2013.10.04 11:21:00l12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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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훌드리히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독일어권에서 루터의 종교개혁 다음으로 독자적 개혁운동은 스위스의 쮜리히에서 일어났다. 이 운동의 중심인물인 훌드리히 쯔빙글리는 루터가 태어난 날보다 두 달쯤 후인 1484년 1월에 토겐부르크의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498년부터 1506년까지 비엔나와 바젤 대학에서 대학의 기초학문을 배웠다. 그는 바젤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1506년부터 1516년까지 글라루스에서 미사사제로서 봉직하며, 신약성서와 교부들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그는 1512/13년에 이탈리아 안에서 스위스군의 야전 설교자로서 설교하기도 하였다. 당시 세대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인문주의자 로테르다무스의 에라스무스가 1514년 바젤에 서적 판매상들과 만나기 위하여 왔던 계기로 쯔빙글리는 그의 인문주의 시각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1516년에는 바젤에 있었던 에라스무스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그는 분명한 종교개혁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1520년에 그는 루터 저작들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쯔빙글리는 로마 교황권에 대하여 논박하였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해석의 영향 아래 ‘오직-성서-원리’의 개혁적인 성서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쯔빙글리에게 미쳤던 영향이 결정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급격한 변혁과 교회 지배세력이었던 사제교회와의 공공연한 투쟁은 그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그는 온건한 인문주의 개혁가로서 교회를 점차 인문주의적 그리스도교로 만들고 순수한 신앙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쮜리히의 성직자들과 친밀한 유대를 갖고 있었고, 1518년에는 자신의 신청으로 교황의 시제라는 칭호를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면부에 대한 그의 반대는 텟첼에 대한 루터의 반대에 비길 만하다.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있었던 라이프찌히 논쟁에서 루터의 대담한 태도가 그를 루터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였다. 루터에로의 그러한 변화는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1522년 4월 7일부터 9일까지 쮜리히의 감독의 대표단과 논쟁을 통하여 시민들을 생동하게 만들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에 대하여’라는 글을 기술하여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혁에 대하여 쮜리히 의회가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하여 1523년 1월 29일 첫 번째 쮜리히 논쟁을 벌였다. 그의 가장 중요한 개혁적인 문서인 ‘67개 종결논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으나 기대했던 결론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콘스탄쯔의 주교 총대리 요한네스 파베르가 결정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의미 있는 글 ‘종결논제의 해석과 근거’를 출간하여 개혁을 시작하였다. 9월 말에는 대성당 법규의 새로운 규정이 발표되었고, 쯔빙글리의 의도와 무관하게 감행되었던 성상파괴는 10월 26일부터 28일까지 두 번째 쮜리히 논쟁을 불러왔다. 성상의 제거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1523년 말부터 교회개혁은 시의회의 목사들과 회원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지도를 받았다. 이러한 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배와 교회법으로부터의 급진적인 단절을 의미하였고, 성서에 기초되어지지 아니한 개혁들은 배제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 미사와 함께 사용되었던 오르겔, 찬송가, 제단들 그리고 성상, 성물 또한 마지막 기름부음도 사라지게 되었다. 교회의 관리, 혼인입법, 관습법제정 등은 시의회의 권한에 두었다. 1524년 4월 개혁의 저항을 위하여 다섯 개 도시연합이 결성되었다. 한편 6월에는 쮜리히 교회로부터 화상들이 제거되었다.

1524년부터 1529년 사이에 스위스 연방이 둘로 첨차 나누어져 갔다. 로마 가톨릭 다섯 개 도시연합은 우리, 슈비스, 운터발덴, 쭉, 프라이부르크이었고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위하여 쮜리히, 바젤, 베른, 샤펜하우젠, 성 갈렌 등의 도시들이었다. 1525년 1월 17일 유아세례 반대론자들과 논쟁이, 1월 21일에는 첫 성인세례가 있었다. 4월 13일 성만찬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발표되었고, 5월 27일에는 ‘세례에 대하여, 재 세례에 대하여 그리고 유아세례에 대하여’라는 글을 기술하여 세례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마르틴 루터와의 논쟁은 1527년부터 진행되어 1529년 마부르크 신앙대화까지 주요하게 성만찬 논쟁이 진행되었다. 1528년 4월 21일 쮜리히에서 첫 번째 노회가 열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쯔빙글리는 1531년 10월 11일 카펠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하인리히 불링거(1504-1575)가 그 개혁을 이어갔다. 쯔빙글리의 신학의 중점은 죄를 그것에로 소급하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쯔빙글리와 루터 사이에는 성만찬 이해에 큰 차이를 보였으며, 그리스도 이해에 있어서도 신인양성의 상호 사역의 방법에 대하여서도 다소 차이를 보였다. 칼빈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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