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위한 진정한 성경적 의미 로마서에서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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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위한 진정한 성경적 의미 로마서에서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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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7.3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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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종 총장 (백석대학교)

정전 60주년을 맞아 최근 한국 교회는 이를 기념하며 한반도 평화를 소망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 소이산 평화기도회를 비롯해 UN 참전용사 초청 예배, 평화협정 세미나, 북한인권을 위한 기자회견, 평화 성명서 발표 등 많은 모임과 성명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평통기연은 최근 한반도 평화정착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국제포럼을 열었다. 참가자들의 발표 중 일부를 선택해 실었다. <편집자 주>

한반도 평화와 통일문제는 한 민족 전체의 과제다. 한국 교회는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양은 물론, 38선 이북 땅 전역에 무너졌던 3,200여 교회를 다시 세울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통일을 밑거름으로 삼아 세계 선교의 주역이 되는 그 날이 도래하길 소망하고 있다. 

기독교신자로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문제를 논의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어떠한 신학적ㆍ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예기치 않는 정치적, 군사적 격변을 통해 남북이 통일되었다고 해도 남북에 사는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여전히 서로 반목하고 갈등관계에 있다면 단순히 정치적인 남북통일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북이 어떻게 화해와 협력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하나 됨과 평화적 통일을 가져올 수 있을까. 이 문제에 관해 신약성경의 로마서는 남북의 화해와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중요한 메시지를 제공해준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추구하고자 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1세기 기독교의 긴급한 현안문제다.

이는 좁게는 로마 교회 안의 유대인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 사이의 화해와 협력을 통해 하나 됨과 서바나 선교지원, 넓게는 지중해 연안의 이방인 크리스천교회와 유대인 예루살렘교회와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기독교복음의 세계화라 할 수 있다. 그가 로마 교회를 그렇게 방문하고자 원했던 것도, 방문에 앞서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 이유도, 당시 로마 교회가 안고 있던 현안의 문제인 유대인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 사이의 갈등 문제였다(롬 11:1-36; 14: 1-15:32). 바울이 볼 때 당시 로마 교회의 현안은 로마 교회만의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 교회나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와의 화해와 협력의 문제는 인종적ㆍ계층적 갈등의 해소 문제를 뛰어넘어 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제시되고 있는 피조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 실현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의 복음(롬 1:16-17; 3:21-31)은 인류 전체로 대변되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창 12:2-3)의 성취에 관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로마서를 화해의 메시지로, 즉 하나님과 인류 세계 전체와의 이 수직적 화해에 근거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수평적 화해를 위한 메시지로, 사도 바울을 화해를 위한 제사장으로, 그리고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려는 헌금을 화해의 제물로 읽을 수 있다면, 로마서를 남한과 북한이 안고 있는 현안의 문제에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로마서를 로마서 자체가 갖고 있는 무대장치, 곧 주후 1세기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정황에 비춰 읽고, 그리고 이를 남북의 화해와 협력문제와 비교해 적용 할 경우 로마서는 많은 점을 오늘날 한국 교회에 시사해 준다.

특히,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화해 메시지와 이 화해의 메시지를 실현하기 위한 바울의 적극적인 자세는 남북한 사이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려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일방적인 수직적이거나 수평적인 로마서 읽기가 아닌 양면의 장점을 활동한 통합적인 로마서 읽기가 필요한 것처럼, 진보나 보수의 장점을 활용한 균형 있는 통일 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바울의 이신칭의의 신학이 현장의 적용을 위한 실천신학이었던 것처럼, 통일신학은 연구실의 신학으로 머물지 않고, 남북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실질적으로 가져오는 실천신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셋째, 사도 바울 자신이 화해의 제사장과 사신이 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헌금을 가지고 직접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던 것처럼, 통일신학자들은 물론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한민족의 사신과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필요하다면 직접 이북을 방문하여 화해를 위한 제사장이 되는 행동신학자, 실천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온갖 오해와 어려움, 심지어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의 복음의 진정한 구현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위해 헌신했던 것처럼 한국 교회와 지도자들이 로마서에 나타난 화해의 메시지와 이를 실천하기 위한 제사장적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은 물론 그로 인한 남북통일과 하나 됨은 점점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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