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언론은 '형상' 보다 '본질' 드러내는데 힘써야 -대담:서정우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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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언론은 '형상' 보다 '본질' 드러내는데 힘써야 -대담:서정우박사
  • 승인 2003.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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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 혁명에 속도가 붙었다. 앞으로 그 변화의 정도가 어디까지 일런지 예측 할 수가 없다. 보는것과 읽는것 말하는 것의 형태가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매체가 서로 융합하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전화와 TV가 합쳐지면서 영상전화가 만들어졌고 신문, PC, 통신위성이 결합하면서 인터넷 신문이 탄생됐다. 언어는 기호가 되고 영상은 디지털 신호로 바뀌는 등 그 변화는 끝이 없다.

서정우 교수(연세대)는 이러한 매체 환경의 변화속에서 기독언론은 이럴때 일수록 ‘형상’보다는 ‘본질’을, 물질보다는 정신을, 육신보다는 영혼을, 순간보다는 영원을, 강한것 보다는 약한것을, 세상 질서보다는 하나님 질서에 충실한 매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기독언론은 교회와 신자들이 정의로운 길을 가도록 선도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기독언론이 지향해야 할 가치와 책임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우리사회가 방향감각을 잃고 요동하는데 가장 책임을 통감해야 할 기관 셋을 들라고 한다면 대학과 교회 그리고 언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정치권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지만 이 세기관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 하는 것이지요.

대학의 교육적 기능, 교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 언론의 올바른 감시기능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건강한 사회’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기관들이 사회로 부터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정의로운 사회는 정말 요원한 ‘꿈’이 될 것입니다.

‘기독언론’은 교회와 언론을 엮어놓은 기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사명이 얼마나 막중한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기독언론은 일반 언론과는 다른 매우 중요한 특성(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형상’보다는 ‘본질’을 강조해야 한다는 점이지요.

즉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물질보다는 정신을, 육신보다는 영혼을, 순간보다는 영원을, 강한것 보다는 약한 것을 강조하고 세상질서 보다는 하나님의 질서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지금 이처럼 ‘보이지 않는 가치’에 얼마나 충실한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두가지 예를들어 볼까요?

겨울철 깊은 산속에 여장을 풀고 잠을 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밤중에 ‘찌익-솨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간밤에 소리없이 내린 눈이 소나무 가지에 쌓여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 나뭇가지가 찢어지면서 눈이 흘러 내리는 소리이지요. 손으로 만지면 없어지고 햇빛이 나면 곧 녹아 없어지는 눈은 물도 아니고 얼음도 아닌 그냥 부드럽고 약한 물질입니다.

반면에 소나무는 인간세상에서 강한것의 대표적인 물질이지요. 심심산중에서 들리는 그 소리는 우리에게 약한 물질인 눈이 강한 물질인 소나무 가지를 이기는 장면을 의미있게 전달합니다.

‘대부’라는 영화가 상연된 적이 있었지요. 폭력가의 황제라고 할 수 있는 대부가 어느날 오후 정원 벤치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손녀의 티없이 맑은 눈동자를 쳐다보는 순간, 그 눈망울 속에 자신의 형상을 발견하고는 안으로부터 산산히 무너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간 세상의 상식은 강한것이 약한것을 정복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장면은 문자 그대로 약한것이 강한 것을 정복하는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겠지요. 어린이는 대단히 약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린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며 최고의 도덕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속에 어린이를 비유해서 경고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 영화속에서 대부는 손녀의 눈망울속에 비치는 자기의 형상을 발견하고는 그 순수하고 티없는 손녀의 위력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기독언론은 이처럼 약한것이 강한것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므로써 약한자에게 소망을 주고 감동을 주는 매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 미디어 환경이 크게 변하고 있습니다. 다매체시대에 신문의 장래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뉴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신문이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얘기가 있으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문의 여론형성과 의제설정 기능은 너무도 중요하고 독특한 역할이기 때문에 아무리 영상매체가 발달하고 인터넷이 보편화된다 하더라도 절대로 다른 매체가 그 기능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TV가 등장했을 때, 신문은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신문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리라 봅니다. 그 대신 신문도 종이신문에 머물지 말고 뉴미디어와의 접합 등으로 변화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겠지요. 사실 신문이나 방송은 사회적인 ‘필요성’에 의해 생성되었습니다.

신문이든 방송이든 교회든 학교든 사회적인 필요성 여하에 따라 발전도 하고 쇠퇴하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20년대 라디오 등장, 1950년대 TV등장, 그리고 1990년대 인터넷 등장으로 인쇄매체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논제로 많은 심포지엄과 논의가 있었지요.

그런데 종이신문의 미래를 우려한 것과는 달리 세월이 흘렀지만 20년대도, 50년대도 잘 넘겼습니다. 신문은 사회에 필요한 매체이기 때문이지요. 인터넷 시대에도 인쇄매체로써 신문은 계속 성장할 것입니다.

아무리 다매체 세대라 할지라도 인쇄매체만의 고유기능이 있기 때문이지요. 소리(라디오)는 흩어지고 영상(TV)은 사라지지만 문자는 오래동안 지속 됩니다. 라디오와 TV는 ‘느끼게’하지만 문자(신문)는 ‘생각하게’합니다. 아시다시피 느끼는 것은 ‘감성영역’이고 생각하는 것은 ‘이성의 영역’이지요. 인간이 사고하는데 필요한 두 ‘축’에 있어서 우선순위는 ‘이성’이 먼저고 ‘감성’이 그 다음입니다. 이것이 인간사고의 기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뉴미디어가 출현하더라도 약간의 도전과 변형이 있을런지 몰라도 기본(신문)은 영원할 것입니다. 또, ‘생각하게 한다’는 연장선에서 신문에는 해설과 논평이 있고 호흡이 긴 글이 있습니다. 소리매체나 영상매체, 인터넷은 주요사건에 대한 심층분석이나 논설등의 기능면에서 신문을 앞설 수 없습니다. 게다가 신문은 휴대하기 편리하고 거리감이 없고 활용가치가 크지 않습니까?

-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기독언론들은 어떤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일반 언론과 마찬가지로 기독 언론들도 일반매체들의 변화와 수용자(구독자·시청자)들의 욕구를 세심히 읽으면서 대처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가능성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신문매체의 ‘정보선별’과 ‘여론수렴’기능에 대한 주목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문을 보는것은 단순히 정보가 많아서가 아니라 유관된 정보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고, 이들속에서 여론의 흐름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미래의 신문은 폭증하는 정보의 홍수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고 이를 토대로 여론을 창출할 수 있도록 정보의 ‘가공’과 ‘분석’, ‘평가’의 전문성을 한층 강화하지 않으면 안될것 입니다.

두번째는 신문의 정보서비스 제공방식에서 ‘개체지향적 서비스’개념의 도입문제입니다. 이제 독자는 익명적 대중 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취향과 관심영역을 중요시하는 독립적인 개체로서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개체지향적인 정보제공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개체 지향적 신문의 가능성을 인터넷을 이용한 이른바 ‘맞춤신문’에서 발견합니다. 물론 기독언론은 독자의 구미에 맞추는데 급급해선 안되고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내용으로 구성돼야 겠지요. 어쨋든 맞춤신문은 독자의 관심분야별로 보고싶은 기사유형을 사전에 선정하고, 수많은 기사중에서 각 독자가 원하는 기사들로 구성된 별개의 지면을 제공합니다. 그밖에 기사의 전문성을 높이지 않으면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슴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언론은 전문성제고에 보다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대담자=최명국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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