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과 관련 신앙적으로 평화의 개념 정립할 신학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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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과 관련 신앙적으로 평화의 개념 정립할 신학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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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7.2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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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형윤 교수 (안양대 실천신학)

최근 북한에 재입북한 탈북민이 다시 탈북하는 과정에서 중국 공안 다시 검거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연초 3차 핵실험으로 논란을 가져온 북한핵무기 개발문제는 이제 소형핵기술개발 논란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같이 탈북민과 북한핵 문제는 이제 정치ㆍ사회적으로 우리 사회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사회와 밀접한 두 가지 주제에 대해 실천신학적 시각에서 바라본 발표문에 대해 정리해 실었다. <편집자 주>

성서에서 말하는 평화는 무엇일까. 구약성서에서 평화의 의미는 흠 없는, 건강한, 완전한 뜻으로 건강, 번영, 정치적이고 영적인 행복의 의미로 나타난다. 또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과 화목한 관계를 나타내는 평화의 의미로 사용된다. 구약과 신약에 마음의 안전과 평안, 하나님의 평화, 영적 평강, 사람과의 화목, 비폭력 무저항의 평화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평화에 일치한다는 설명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구약에서 평화의 포괄적인 의미가 신약에서 더욱 정확한 의미로 나타난다.
그러나 평화를 말할 때 전쟁에 대해 병행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전쟁은 언제나 평화를 위협했고 평화는 전쟁에서의 평화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역사에서 전쟁과 관련해 절대적 평화주의, 정의로운 전쟁, 성전론 등이 언제나 제기되었고 교단화 현상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또한 제3국의 빈곤현상, 무역 불균형 등은 전쟁비용이 한 요인이 되었고, 그로 인해 개발도상국의 핵무기 개발은 성전을 일으킬 위험 등이 늘 존재한다.

핵시대 원자력의 핵분열은 우리의 전통적 사고방법을 없애고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없었던 파국을 향해 흐르고 있다. 만약 인류가 살아남길 원한다면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고방법이 필요하다는 아인슈타인의 경고를 떠올려야 한다. G. D. 카우프만은 핵시대에 있어 신의 이해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는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어느 역사적 상황에 형성된 신의 표현을 현대에 맞춰 기우는 것 자체의 무모와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이같이 핵전쟁은 생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1937년 옥스퍼드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는 전 세계 교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모든 민족 가운데 회원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는 전쟁을 유보함이나 제한함 없이 심판해야 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즉 전쟁은 언제나 죄의 결과요 죄의 출현이라는 것이다. 1958년 니보르고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 연구보고서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전면전에서의 핵무기들의 사용을 결코 승인할 수 없다고 밝힌다. 이렇게 교회가 핵무기를 절대 악으로 본 이유는 신학적으로 핵무기는 인류의 죄의 원형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는 핵무기를 멸망으로의 임박이라고 했다.

중세에는 토마스 아쿠빈의 질서나 체계의 신학이 그 시대를 인도했고, 근대 합리주의 시대에는 하르낙의 자유주의신학이, 근대 불확실성 시대에는 칼 바르트, 루돌프 불트만의 실존적 신학이 시대의 방향을 이끌었듯이 오늘날 폭력이 지구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에서는 신학 성서의 비폭력주의에 근거한 평화 신학이 요청되고 있다.

평화 신학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변화에 관련된 실천신학적인 과제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어떤 평화를 추구했으며 그러한 평화는 오늘 핵시대에 평화 신학을 어떻게 수립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해 주는 모델이 되었다.

또한, 오늘날 세계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자기 이해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이해로 말미암은 화해 능력, 원수 사랑을 통한 정의 구현, 신뢰구축은 그리스도교의 평화신학의 방향과 노선을 제시해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제도 교회 밖에서 성서적 동기의 평화신학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으로부터 윤리해방이 있었고, 또한 지역 국가의 어느 정교에서는 정치적 평화질서의 근거로 중립성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평화신학의 기초와 관련해 보편평화신학으로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21세기 핵전쟁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완전히 뛰어넘는 적군과 아군을 초월해 인류의 멸망을 의미한다. 또한 핵무기를 정치적 문제만이 아니라 신학적 문제로 제기하는 것은 이를 인류를 위협하는 차원만이 아닌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그것을 용인할 수 없는 신앙고백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 독일 사제나 목사들이 신학과 교회가 현실성을 잃고 있을 때에 사회학이나 심리학을 연구해 어떻게 하면 교회와 신학을 개혁할 것인가, 분열된 사회 빈민가를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하여 십자가 신학을 제창해 디아코니아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독일신학이 1970년대 전후부터 정치, 경제, 사회학 등을 파트너로 사회성을 갖는 신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평화 신학은 모든 것을 통합하는 사회의 과제가 된 것이고 이웃의 생과 죽음 이상으로 인류 전체의 생과 죽음, 지구의 운명이 평화 신학에 달려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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