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객관화는 인간의 창조적 본 모습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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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객관화는 인간의 창조적 본 모습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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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4.23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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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신학 이야기(51)

제리 프랭카우서의 저서인 ‘독수리와 닭’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새들의 왕인 독수리가 새끼 때부터 닭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닭 모이를 먹는 독수리는 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닭들처럼 행동하면서 더 이상 자신이 독수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독수리를 날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넌 독수리야. 날개를 펼쳐서 날아보아라”고 지붕위에서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 태양을 향해 번쩍 들었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부르르 떨더니 서서히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여 마침내 하늘을 향해 날아 올라갔습니다.

독수리는 창조될 때부터 독수리였습니다. 비록 닭들과 함께 먹고 살았지만 독수리의 본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잠언서 20장 5절에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같으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우주의 모든 것을 다르실 복을 이미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무한대함을 품을 수 있는 것은 명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소명하신 것입니다. 목회자가 기업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운영방식에 젖어있다고 기업인의 방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독수리처럼 우리는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존재로써의 근원과 본질을 잊어버리는 영적 건망증에 굴복해 오고 있습니다.

망각이 우리의 모습자체를 왜곡 시킬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로 인해 자기 본연의 창조성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길러지는 것이라고 하여 교육의 본질을 그 곳에 두기 때문에 세상적 조건을 갖춘 고통과 불안의 길을 가게 만듭니다. 길러짐 때문에 영원한 불구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길들이려고 하면 독수리는 닭 울타리 안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교육은 본성을 찾기보다는 습관에 의해 반복된 길들임에 있습니다.

건축가인 송효상(2011년 광주디자인 비엔날레 총감독) 씨도 건축가로서의 기본사상을 ‘항상 시각을 달리하려고 나를 타자화(他者化), 객관화 하려고 훈련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객관화는 인간의 창조적 원래의 모습의 회복입니다. 누구와 똑같은 쉬운 형태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조는 창조일 뿐입니다. 창조는 지속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길들여졌다는 것은 전통적 교회에 길들여져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중요성은 길들여진 같은 형태로서가 아니라 나만의 주신 하나님의 사실입니다. 목회는 나 개인의 습관에 일부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이나 장소나 버릇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하고 있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금욕적이거나 극단적인 철저한 무릎이 헤지도록 했다는 기도생활 외의 모든 것 과는 아무관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습관은 습관에 의한 습관이 아니라 본성에 의한 반응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이냐 곧 예수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무엇이냐에 따라 나타나는 반응이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목회인 것입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자기 자신의 위대한 창조주와 하나이며, 완벽하고 온전한 영적 존재라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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