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역=신뢰+믿음+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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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역=신뢰+믿음+기도”
  • 김동근 기자
  • 승인 2013.04.04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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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모지에서 시작한 우간다 선교 18년 송인진 선교사

▲ 우간다의 미래,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도 진행된다.
보통 아프리카라고 하면 가정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사막’이 아닐까 싶다.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더위를 피하고 있는 흑인들. 그게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다. 아프리카 우간다는 ‘빅토리아 호수’의 왼쪽에 위치해 있다. 게다가 영토의 3분의 1이 호수다. 이 때문에 생각보다 녹지가 많은 편이다.

그 녹지에는 코끼리며 원숭이 등 우리가 동물원에서나 봤던 동물의 왕국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지만 이런 발전가능성이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간다는 아직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혹자는 “좋은 자연환경에 쉽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어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우간다.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송인진 선교사를 만났다.

▲ 우간다 고리 지역의 송인진 선교사
인도에서 우간다로
사업가의 길을 가던 송 선교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학생이 됐다. 어렵사리 신학교를 마친 후에는 ‘한국외항선교회’라는 단체에서 행정사역을 담당하게 됐다.

“그 당시에는 내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나 불평도 많았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 때 한국 교회의 선교 후원, 흐름 등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이렇게 사용하시기 위해 저를 훈련시키셨던 것 같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동안 섬겼던 선교단체를 떠나 이제 본격적인 선교에 나서고자 했던 그는 인도를 마음에 품었다.

어떤 이유도 없이 언젠가부터 막연하게 인도로 선교를 가야겠다는 자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졌다. 목적을 가진 인도방문도 두 차례나 이어졌다. 그렇게 인도 선교가 준비되어갈 때 즈음 외항선교회에서 아프리카 우간다의 아치비숍(대주교)의 가이드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간단한 운전과 안내를 맡으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던 그에게 어느 날 대주교는 “한국 교회의 부흥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며 “그 원동력이 기도라는데, 가장 큰 기도원에 나를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 때 오산리기도원으로 그 분을 모시고 갔어요. 금식기도원이라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 날이 월요일이었는데, 금요일에 다시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죠. 처음에는 힘들 것 같아서 말렸는데, 워낙 완강해서 두고 왔어요. 금요일 가니 얼굴에서 빛이 나더라고요. 그가 온전히 하나님께 기도드렸다는 사실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전해졌죠.”

대주교가 다시 우간다로 돌아간 뒤 얼마 안 되어 걸려온 전화 한 통. 우간다의 대주교였다. 우간다에 한 번 와보라는 대주교의 말에 송 선교사는 간호사 둘을 대동하고 우간다로 단기선교를 떠났다. 허허벌판, 있을 것이 없는 곳, 일을 할 수 있는 곳조차 없던 우간다. 의료봉사와 힘을 보태며 지냈던 나날.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지날수록 그의 마음에는 우간다를 향한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리고 당시 10년 전부터 우간다에서 의료사역을 하고 있던 김정윤 선교사에게 “기도해보라”는 말을 듣고 다시 대한민국으로 입국했다.

식지 않았던 우간다를 향한 마음. 뜨거워졌던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인도 선교를 준비하던 어느 날, 성령님은 또다시 강한 역사로 그를 우간다에 부르셨다. 그리고 인도 입국 이틀 전 그는 우간다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오랜 기도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사르밧 과부의 기름병
그렇게 우간다로 떠난 것이 1995년.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서도 약 500km 떨어진 마을 고리(Goli)는 기초산업시설이 전무한 곳이었다. 주로 농사를 업으로 삼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송 선교사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또 고민했다.

처음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들의 영성을 회복시키는 사업. 세부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영성의 회복이라고 생각했던 송 선교사는 영성 훈련센터를 건축하기에 이른다. 재정은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아래 속도를 냈다.

“현지에서 처치오브우간다(Church of Uganda)라는 교단에 속해 사역을 하고 있는데, 그 교단에서 처음 세워지는 선교훈련센터였습니다. 당시 반란군과의 내전에 길은 차단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재정도 마련되지 않았었죠. 시작은 했지만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공사가 시작되고, 주변의 우간다 교인들이 동원돼 주춧돌을 놓았다. 신기한 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 함께 모여 카메라를 바라보는 우간다 어린이들
“준비된 돈이 얼마 되지 않았었는데, 모자라 필요할 때마다 딱 그만큼씩 통장에 돈이 들어와 있는거예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예장 통합, 합동, 대신 교단에서부터 미국, 캐나다까지 저는 한 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는데 그들이 먼저 돕겠다고 나섰죠. 그때 깨달았습니다. 일이 크던지 작던지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순종하면, 모두 채워주신다는 것을 말이죠.”

마르지 않던 사르밧 과부의 기름병처럼 송 선교사의 재정도 끊임없이 채워졌다. 하나님은 그 사건으로 그를 더욱 순종하는 종으로 훈련시키셨다.

마음으로 드려진 ‘헌금’
▲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 기도하는 우간다 어린이.
영성훈련센터 건립 후 성도들의 영성 회복은 계속됐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이들을 위한 세부적 사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송 선교사는 다시 하늘을 향한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자녀들이 작정헌금을 내며 그에게 말했다.

“주일학교 교육관을 만들어주세요. 나무 밑에서 넋을 놓고 있는 아이들이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있는, 함께 모여 찬양할 수 있는 교육관을 지어주세요.”

그제야 눈에 들어왔던 아이들. 자녀들의 사랑이 담긴 헌금으로 교육관 건축이 시작됐다. 언제부터인지 재정은 더 이상 걱정할 대상에서 제외됐다. 오로지 순종하고 기도할 뿐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우간다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관이 건축됐다.

우간다의 어린이들이 성장해 청소년, 청년이 되면 무엇을 해야할까. 기초산업시설이 전무한 우간다에서 젊은이들에게 뭔가 힘을 주고 싶었던 송 선교사. 그리고 컴퓨터 전문가를 양성하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간다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 컴퓨터 교육을 하기로 마음먹고, 요청을 했는데 오래된 컴퓨터 일곱 대를 받았어요. 아프리카에 보내는 물건은 좋지 않아도 된다는 편견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을 무시하는 것 같아 불쾌했었는데 몇 달이 지나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죠. 컴퓨터를 처음 접한 아이들이 대부분을 고장내고 말았거든요.”

그렇게 시작한 컴퓨터 강습은 ‘굿뉴스 컴퓨터스쿨’이라는 이름의 정식교육으로 이어졌다. 또 앞으로 IT전문대학으로의 육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로써 우간다의 젊은이들이 얻은 교훈은 한 가지 바로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송 선교사는 유치원과 주일학교 등으로 우간다의 아이들을 섬기고 있다.

우간다의 첫 ‘노인복지관’
젊은이들을 교육시켜 차세대 리더로 키워내려는 노력이 계속되던 어느 날 하나님이 주신 말씀 “네 부모를 공경하라”.

다시 기도를 시작한 그는 응답을 받고 실행에 옮겼다. 우간다에서 처음 세워지는 노인복지선교관. 60세 이상의 노인들의 선교와 복지를 위한 공간이었다. 현실에 맞지 않는 높은 차원의 노인복지가 아니라, 줄 수 있는 것을 제공하자는 의미가 사역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노인복지선교관이 얼마 전 문을 열었다.

“우간다에 처음 도착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기도제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영성훈련센터였고, 둘째가 전기를 달라는 것, 셋째가 전화, 넷째는 경비행장, 다섯째가 6~7m되는 부실한 다리를 튼튼히 만들어달라는 것이었지요. 첫째는 이뤄졌고, 둘째는 16km정도 떨어진 강에 수력 발전소가 지어지면서 해결됐습니다. 영성수련센터 주변에 이동통신사의 기지국이 건설되면서 전화에 대한 기도도 들어주셨고, 대통령 영부인이 영성훈련센터 헌당예배에 참석하겠다는 편지가 오자 긴급 편성된 예산으로 경비행장도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온 알 수 없는 돈으로 튼튼한 다리까지 생기는 등 하나님께서는 모든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서쪽으로는 콩고, 동쪽으로는 케냐, 북쪽으로는 남수단, 남쪽으로는 탄자나아가 접경해 있는 우간다. 송 선교사는 우간다를 아프리카 선교의 시작점으로 생각한다.

“주변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회교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간다 인구 중 40%가 개신교인입니다. 질병과 가난, 전쟁에서 살아남은 우간다 사람들은 열정과 체력, 선교적으로 훈련됐습니다. 이런 사역에 한국 교회가 동참할 때 아프리카라는 대륙도 복음으로 치유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시는 그림 중 하나의 정확한 퍼즐이 되고 싶다는 송 선교사. 그가 걸어온 18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역사하셨다.

▲ 활짝 웃고있는 우간다의 한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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