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구한말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기독교 일번지 ‘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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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구한말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기독교 일번지 ‘정동’
  • 이덕형 기자
  • 승인 2012.11.23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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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돌담길을 따라걷는 에큐메니칼 역사 순례

▲ 가을길따라 이어지는 '정동 순례길'여정의 전체 전망은 이화여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이화여교 협조 아래 교직원 식당에서 찍은 정동일대 전경.

‘큰 평안’ 뜻하는 ‘대안문’ 고종강제 퇴위 후 이름 변경
‘최초’ 수식어 붙은 유적 정동일대에서 반갑게 만나

출근길과 퇴근길 혹은 평소 걷기 좋은 곳에 기독교역사가 담긴 순례길이 있다면 어떨까. 서울 시내 시민들이 즐겨 찾는 장소 중 한국기독교 문화와 한국의 아픈 역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 있다. 서울시 중구 정동. 덕수궁을 중심으로 구한말 많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이곳은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현장이기도 하고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생겨난 근대교육의 산실이기도 하다. 누구나 한 번쯤 걸어봤을 그 길을 따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주최한 에큐메니컬 정동 순례여정에 참여했다.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내부의 모자이크.
덕수궁 대한문을 기준으로 오른쪽 돌담길을 따라가다 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러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보면 오른쪽으로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이 보인다.

정동 순례길이 시작되는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곳은 1917년 설계가 완성됐고 1922년 부분 완공 됐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1996년에 이르러서야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당시 한국 성공회 3대 주교였던 트롤로프 주교는 성당 설계를 맡은 건축사 아서 딕슨에게 시공 전 교회를 △교회활동을 고무하고 전도의 용기를 주는 교회 △다른 민족도 교회를 통해 한 가족임을 느낄 수 있는 공간 △규범과 절차에 맞는 예배가 가능한 장소 △미래 교회 건축의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는 건물로 세워주길 부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바람은 교회 곳곳에 그대로 묻어나 있다. 본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면에 보이는 성화 모자이크. 영국에서 특수 제작한 색유리 구슬로 만들어진 모자이크 가장 윗부분에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1928년에, 그리고 아래 부분에 위치한 성모마리아와 첫 순교자 스테판 집사, 이사야 선지자, 성 니콜라스 모자이크는 1938년에 완성됐다. 또한, 본당 서쪽에는 한국전쟁 때 전사한 영국과 이일랜드 군인들을 기념하는 소재단이 위치해 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정창진 부제는 “한국에 들어온 성공회는 하이처치로 중세 이전 교구신학의 교회 전통을 따르는 경향이 있어 엄숙한 미사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성당 인근에는 전통한옥으로 만들어진 경운궁 양이재와 성공회성가수녀원도 확인할 수 있다. 순례길을 이끈 감리교 신학대학 이덕주 교수는 “로마네스크 양식과 전통 기와집 양식이 조화된 이곳은 자연스럽게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라고 말했다. 이어 “6.10 민주항쟁이 시작된 이곳은 해방 이후 민주화 운동의 거점이 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한문에 담긴 고종의 눈물

▲ 대안문이 대한문으로 변경되기 전 있던 장소.
매일 수문장교대식이 열리고 있는 덕수궁 대한문. 이곳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고종의 눈물이 담긴 장소다. 집 대문이 보통 담 중앙에 위치한데 비해 덕수궁의 정문은 독특하게도 돌담이 끝나는 부분에 위치해 있다.

이덕주 교수는 “고종황제가 강제퇴위 한 이후 덕수궁 문의 위치도 지금의 위치로 바뀌었고 이름도 ‘큰 평안’을 뜻하는 대안문에서, 큰 무뢰한이라는 뜻의 대한문으로 바뀌게 됐다”고 말했다. 일국 황제가 드나드는 문은 망국의 비통함으로 그 위치도 집 중앙이 아닌 귀퉁이에 마련된 것이다.

원래 대안문의 위치는 현재 서울시 서소문청사1동이 마주보는 덕수궁 담에 있었다.

대한문은 기독교역사에서 민족해방을 위한 기독청년의 활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반대하던 국권상실 반대상소운동이 이곳에서 열렸고 해주애국청년회대표로 조국을 찾은 백범 김구 선생은 그 때 이곳을 방문했다. 서울 정동제일교회 제1회 구국기도회에 참여한 기독교청년들도 이때 국권회복을 위한 운동을 함께 펼쳤다.

이덕주 교수는 그 때부터 대안문 앞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순례길의 여정은 오늘날 한국 선교초기 교회가 보여준 교회 공공성 회복을 위한 여정”이라고 말했다. 대한문 인근에는 쌍용자동차해고 노동자들이 마련한 희생자 추모와 위로의 공간이 있었다. 순례단은 그 곳에 들려 기도를 올린 후 배재학당으로 이동했다.


배재학당

▲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내부 모습.
정동일대에 감리교선교구역이 조성된 데는 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의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배재학당이 이었다. 신정로 반대편 현 러시아대사관 인근에 위치한 배재학당.

아펜젤러가 처음 세운 배재학당은 르네상스양식의 단층 건물로 왜송골로 불린 곳에 터를 잡았다. 이덕주 교수는 “당시 아펜젤러는 르네상스에서 종교개혁이 시작이 된 것처럼 한국 최초의 근대화 교육도 믿음과 섬김 안에서 이루어지길 바라는 뜻에서 교사를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었다”고 말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그래서 배재학당의 교훈을 ‘누구든지 크고자하는 사람은 남을 섬겨야 한다’로 지었다. 그의 바람대로 이곳은 이승만 대통령, 주시경 선생, 김소월 시인과 같은 당대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 산실로 자리 잡았다.

배제학당은 한글이 재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학당 내 삼문출판사를 세운 감리교 선교부는 최초 한국에 도착했을 때 국내 문자가 한자와 한글로 이원화됐고 문자가 한자 위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았지만 인쇄 문자로 한자가 아닌 한글을 택했다. 선교를 위해 성경과 많은 선교자료를 한글로 인쇄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이덕주 교수는 “이때부터 삼문출판사에서 인쇄되는 모든 인쇄물은 한자가 아닌 한글로 인쇄됐고 400년 간 언문으로 불리며 잠들어 있던 한글은 그렇게 긴 잠에서 다시 깨어났다”고 평가 했다.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최초로 한글 문법을 정립한 주시경 선생도 배재학당 출신이다. 그는 여기서 한글을 다루며 자연히 한글의 우수성을 간파하게 됐다. 한글창제가 중국 한자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함을 알았던 그는 훈민정음과 언문으로 불리던 우리말에 ‘크다’라는 의미가 담긴 ‘한글’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정동제일교회

▲ 정동제일교회 내부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
배재학당 앞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자연 만나는 교회가 하나 있다. 감리교 정동제일교회. ‘한국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곳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이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중간에 위치한 이곳은 1894년 건축계획이 수립돼 1987년 건축됐다.

건물 특징은 위에서 바라볼 때 성공회 성당처럼 최초 십자가 모형을 하고 있었다는 점. 완공된 이후의 모습은 오늘날 재단에 그대로 남겨져 있다. 재단의 모습은 전형적인 감리교 모습.

이덕주 교수는 “장로교에 비해 예전을 중시하는 감리교는 재단 주변으로는 울타리가 설치돼 성도들이 무릎 꿇고 성찬을 받는 장소로 또는 헌신의 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됐다”고 말했다. 교회 정면에는 1917년 미국 교회 교인들이 한국 교회를 위해 모금해 마련한 파이프 오르간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파이프 오른간은 6.25전쟁 당시 포탄이 투하되며 파괴된 것을 100주년 기념 때 복원 한 것이다.

정동제일교회는 이와 함께 최초의 여성세례, 기도회, 성탄절예배, 주일학교, 조선어 설교, 서양식 결혼식 그리고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회가 이루어진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정동교회 안에는 사회정치단체 성격의 독립협회와 계몽단체인 협성회 그리고 신앙단체인 에벗청년회 등 3개 청년 단체 결성됐다. 당시 최병헌, 양홍묵, 주시경, 신흥우는 에벗청년회 소속이었고 서재필과 윤치호는 독립협회와 협성회 관여했다.


이화학당
정동 순례길의 여정은 이화학당에서 마무리 됐다. 배꽃이라는 의미의 이화라는 명칭은 왕실의 문향에서 비롯됐다. 이덕주 교수는 “배꽃은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꽃으로 당시 건축된 건물에는 배꽃 문양이 건물 맨 위와 중앙에 찍혔고 황실에서 발행한 문서에도 배꽃 문장이 찍혀 황실의 권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황실은 그렇게 최초의 여학교에 황실문장을 이름으로 선물했다.

이화학당은 여성의 자부심을 회복하고 남녀평등의 꿈을 실현하는 기초가 되기도 했다. 학교 입구에는 하마비가 설치됐는데 이는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교수는 “유교문화가 살아있던 당시 최초의 여학교가 세워진 일도 놀랍지만 가장 압권인 것은 여학교 앞에 하마비가 세워진 점이다”고 말했다.

당시 하마비 왕궁이나 서원, 향교에만 설치됐던 것으로 하마비 앞에서는 양반이라도 말에서 내려야 했다. 이화학당이 3ㆍ1운동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한 데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여성으로서 존중받은 그 시작점에는 선교사의 꿈과 황실의 변화된 기대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덕수궁에서 새문안교회 쪽으로 이어진 정동 순례길은 그밖에도 △중명전 △구 러시아 공사관 △구세군제일영문 △대한예수교장로회 새문안교회 등 찾아 볼곳이 많다. 아픈 구한말의 역사와 선교의 기록이 한데 어우러진 여정은 한국 감리교와 장로교의 뿌리가 어떻게 이 땅에 뿌리내렸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곳 주인이었던 마지막 황제 고종은 사라져가는 자신의 나라와 새로운 희망으로 태동하는 교회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답은 한국 기독교 신앙이 태동한 정동 순례길 위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3호 이화박물관에는 정동에서 시작된 한국 여성교육과 인권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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