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돌려주는데 조건이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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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돌려주는데 조건이란 없습니다”
  • 승인 2001.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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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후생학원 후배들에게 1억5천짜리 거처 마련해준 차병원 조주연박사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가난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낯선 보육원 생활을 시작했다. 신문배달, 이발소 잔심부름 등이 그의 일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힘든 상황속에서도 공부를 버리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야간학교를 다녔고 결국 성공이라는 두 글자를 거머쥐었다.

고아에서 의사로 일어선 조주연 박사(서울 차병원 산부인과·53). 굶기를 밥먹듯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꿈을 버리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 지금의 그를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온 조박사의 삶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지금 그가 보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학창시절 구세군과 고 유일한씨 김명선씨 같은 독지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의사 조주연은 불가능했을거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그는 이제껏 받았던 도움을 다시 돌려주고 싶은 소망을 안고 있다. 본인은 그저 받은 은혜를 돌려줄 뿐이라고 겸손히 말하지만 헌신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그의 삶은 차가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는 83년 차병원에 자리를 잡은 뒤부터 봉급을 쪼개 틈틈이 어려운 후배들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이 다녔던 군산북중 야간반 학생과 소년·소녀가장들에게 생활비를 보탰고 후생학원에 1천만원 상당의 컴퓨터를 보내기도 했다.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때는 후생학원을 찾아 격려금을 건네며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조박사가 드디어 새해에 들어서면서 사건을 터뜨렸다.
최근 전북 군산시 신흥동에 아담한 한옥을 사들여 구세군 군산후생학원에 기증한 것이다. 18세가 되면 보육원을 떠나야 하는 후배들이 일자리를 얻어 건장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자립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조박사가 마련한 ‘군산 우리의 집’의 집은 대지 88평에 건평 15평에 시가로 1억5천. 지금은 방 3개로 대 여섯명이 생활을 시작하지만 마당의 창고를 개조하면 20여 명의 식구가 살아가기에 거뜬한 공간이 마련된다. 현재 ‘우리의 집’은 군산대 입학생 등 후배 5명이 살 수 있도록 대대적인 공사가 한창이다.

이러한 나눔의 삶 속에는 그의 보이지 않는 절약정신이 큰 밑거름이 되었다.
수입이 괜찮다는 축에 끼는 의사이면서도 조박사는 아침이면 일반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한다. 러시아워에 차가 밀릴까봐 자가용을 놓고 오는 것이 아니다. 조박사는 자가용이 없다.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에서 자가용은 사치라는 것이 그의 지론. 생활 속에서도 그의 근검정신은 그대로 뭍어 나온다. 우유팩 하나 비닐봉지 하나를 그냥 버리는 일이 없다. 후배의사들의 놓치기 쉬운 낭비도 언제나 그의 지적대상이다.

이번 ‘우리의 집’ 기증도 10여 년 조박사의 내핍생활의 산물인 셈이다. 어린시절 굶기를 밥먹듯이 하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호사스런 생활을 하고 있다며 남을 도울만할 여력이 있을 때 도와야 한다는 그의 선한 마음은 지고지순하다.

조 박사는 중 2때인 62년 부모를 모두 잃고 군산시청 사회과의 소개로 동생과 함께 처음 후생학원에 발을 들여 놓았다. 구세군이 운영하는 후생학원은 불우한 아동들을 수용해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시키는 사회복지 기관이었다.

그는 후생학원에서 2년동안 공부와는 담을 쌓아야 했다. 이발소 보조, 신문배달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았지만 가슴 한 켠의 허전함을 달랠 수는 없었다. 학업에 대한 미련때문이다. 몇날 며칠을 고민하던 조박사는 입학을 결정했고 자는 시간이외에는 공부에 전념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상황이어서 더욱 분발했지만 무엇보다 공부가 하고 싶다는 그의 의지는 단호했다.

중학교 야간반을 졸업하고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68년에는 연세대 의대에 당당히 입학했다. 당시 1백 여명이 넘는 원생 중 대학을 가는 경우는, 그것도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을 가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기 때문에 그는 구세군측의 헌신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 입학등록금은 유한양행 고 유일한박사가 보탰고, 구세군도 조 박사를 아낌없이 후원했다.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김명선씨 등 조박사를 돕기 위한 도우미들의 손길은 계속됐고 이러한 후원에 힘입어 연세·경희대 교수를 거쳐 포천중문의대 교수와 차병원 수련부장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조박사는 ‘우리의 집’을 넓혀 무의탁 노인과 보육원을 떠나는 청소년들이 함께 사는 가족 공동체를 이룰 계획이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우리집’을 말이다.

인생 황혼기에는 사재를 털어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어려운 고학생을 돕는 일로 남은 여생을 보내겠다는 조주연 박사. 인간을 아무 대가없이 사랑하셨던 예수님처럼 그가 말하는 보은의 삶 또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랑의 구주인 예수님의 사랑으로 자란 아이들이 역경을 잘 이겨내고 사회의 건실한 일꾼으로 커나가는데 힘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여전히 소박한 그의 소망이 커다란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김광오기자(kimk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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