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495주년] 종교개혁이 추구했던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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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495주년] 종교개혁이 추구했던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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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0.1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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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홍 교수 특별기고 / (중) 종교개혁은 개혁을 원한 것이지, 분열을 원하지 않았다

보르스회담·레겐스부르크회담 통해 개혁된 하나되기를 논의
기독교 ‘이신칭의’·가톨릭 ‘믿음과 선행’ 주장으로 입장 달라

종교개혁은 교회분열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교회개혁이었던가? 왜 당시 1500년 동안 하나였던 교회는 종교개혁을 통해 나누어져야만 했던가? 오늘 21세기 한국 교회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의 후예들이라는 한국 교회는 하나 되지 못한 채 무수한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최근에도 한국 최대의 교회연합체인 한기총이 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도 그러하다. 특히 장로교가 다수인 한국 교회의 분열은 세계교회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다. 이는 종교개혁 495주년을 맞이하며 한국 교회가 새롭게 종교개혁자들의 역사적 추구를 되짚어 보며, 오늘 한국 교회를 돌아다보며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 (왼쪽) 슈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자 마틴 부처. 그는 개신교간의 분열을 극복하며 더 나아가 구교와 신교의 일치를 추구했던 인물이며 그러한 정신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에게 이어졌다. 그는 또한 칼빈의 중요한 멘토였다. (오른쪽) 1531년 로마의 왕과 1558년 로마의 황제로 즉위한 페르디난트 1세(1503~1564년). 그는 구교와 신교간의 싸움을 종결시켰는데, ‘성주의 종교는 백성의 종교이다’라는 원칙에서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해를 이끈 인물이다.

# 하나이기를 추구했던 종교개혁
교회는 1517년까지 본래 하나의 교회로서 세계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una sancta catholica Ekklesia)였다. 뿐 만 아니라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나서도 종교개혁자들은 한 세대 이상 하나이기를 꾸준히 추구했다. 1530년 루터교의 대 신앙고백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1530)이 성립된 당시에도 멜란히톤과 루터는 두 측이 하나임을 잊지 않았으며, 가능한 개혁되어진 교회로 새로워져서 다시 하나 되기를 소망했다. 새로운 신앙을 보여주는 그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분열을 향한 신앙고백이라기보다는 새로워져야 하는 교회의 신앙고백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개혁프로그램을 제시하며 교회가 새로워지기를 원하였던 것이지 분열하기를 원하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마음은 정치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당시 로마제국과 로마교회를 향해 불편부당함과 그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교회가 나눠지기를 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황제 카알 5세의 부름으로, 그의 장관 니콜라스 드 그랑벨(Nicolas de Granvelle)이 그리고 팔츠주의 성주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가 주축이 되어 모인 1540년 보름스회담(Wormser Religionsgespraech)과 1541년 레겐스부르크회담(Regenburger Religionsgespraech)에서도 개혁된 교회로 하나이기를 원함은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참석했던 프로테스탄트 측, 곧 새로운 신앙 측의 인물들로는 슈트라스부르크의 마틴 부처(Martin Bucer), 제네바의 요한 칼빈(Johannes Calvin), 비텐베르크의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헤센의 요한 피스토리우스(Johannes Pistorius)였고, 옛 신앙, 곧 로마교회 측의 인물들로는 요한 엑크(Johannes Eck) 요한 그로퍼(Johannes Gropper), 율리우스 폰 플루그(Julius von Pflug), 게다가 로마교황청에서 파송된 사람으로는 가스파로 콘그타리니(Gasparo Contarini)가 자문인의 자격으로 함께 하였다. 회담에서 양 편이 함께 토의할 문건으로는 라틴어로 된 보름스 책자(Wormser Buch)의 23개의 신앙조항이었다. 첫 네 조항은 어렵지 않게 일치를 볼 수 있었는데, 5조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에서는 이목을 집중시키는 가운데 특이하게 일치에 이르렀고, 14조의 성찬 이해에서 결정적 차이점을 드러냈고, 두 사이에 첨예한 신학적 차이점만을 부각시킨 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5조 칭의론에 있어도 종교개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가된 의'(iustitia imputata)를 내세웠고, 가톨릭교회 측은 ‘내재된 의’((iustitia inhaerens)를 주장하며, 두 가지 칭의론(duplex iustitia)를 함께 언급하며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려 했지만, 화체설과 교회직분에 대한 입장을 굽히지 않는 구교 측과는 하나로의 꿈은 결코 쉽지 않은 현실로 드러나 무산되고 말았다. 종교개혁 측에서는 성찬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공재(共在)설(루터) 내지는 주님의 영적 임재설(츠빙글리, 칼빈)을 내세웠으며, 영적 신분에 있어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신분이라는 만인제사장설(루터)을 내세워 가부장적인 제도적 교회인 구교와는 일치를 볼 수 없었다.

특히 성찬론 때문에 나누어진 루터와 츠빙글리의 화해를 이끌어내어 종교개혁운동의 일치를 추구했던, 부처는 이미 나누어진 로마교회와 개신교를 화해시키려는 시도까지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부처의 정신은 그의 제자격인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18세 연하의 칼빈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칼빈의 교회일치 추구는 부처에게서와 같이 성찬론에서 드러나고 있다. 부처는 1523/24년 성찬론에 관한 입장을 처음 밝혔는데, 로마교회의 미사희생적 이해와 화체설에는 입장을 달리했다. 부처의 성찬론의 핵심은 언약으로서 죄의 용서와 믿음에 있다. 성찬에 참여하므로 믿는 자들의 신앙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부처의 입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거기다 레겐스부르크 회담에서 신교 측으로부터 황제에게 1541년 5월 31일 공식적으로 새롭게 제시된 9가지 개혁 조항(Regensburger Buch)은 결국 한 교회로의 시도를 더욱 어렵게 하였고, 무엇이 서로에게 분명한 차이점인지를 확인하며 갈라서야만 했다. 4년 후, 가톨릭교회 종교개혁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성찰의 기회를 가졌던 1545년 트렌트공회(The Council of Trent, 1545-1563)에서 가톨릭교회는 급기야 루터와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을 “불경스런 이교도”로 그리고 에라스무스를 함께 출교하기에 이르렀다. 그 일 년 후 1546년 종교개혁자 루터는 63년을 일생으로 이 땅의 삶을 마감하였고, 그 9년 후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해(Augsburg Religionsfriede)를 통해 “성주의 종교는 백성의 종교이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최종 결정에 이른 후 구교와 신교는 오늘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다른 길을 각자 가야만 했다. 1555년의 이 아우구스부르크의 합의는 비로소 로마교회가 새로운 신앙을 기독교의 다른 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임과 동시에 개신교의 역사가 새롭게 기록되기 시작하였다는 말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두 교회가 본격적으로 다른 길을 가기로 결정하기 이 전에 루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루터는 죽기까지 하나의 거룩한 교회를 고백하고 바라면서, 로마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새로워지기를 갈망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라 하겠다.

# 무산된 20세기 두 교회의 연합
물론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20세기 로마교회가 성찬론에서 보다는 칭의론에서 개신교, 특히 감리교와 일치를 보기를 원했다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06년 7월 12일 세계 감리교와 구교가 서울에서 칭의론에 합의했다.

7년 전 1999년 가톨릭교회와 세계루터교가 합의한 ‘칭의 교리에 대한 교리적 합의 선언문’(Jointed Declara 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약칭:JDDJ)에 한국에서 열린 제19회 세계감리교(WMC)대회에서 감리교단이 공식적으로 이 선언에 동참하였다. 그동안 기독교가 오직 믿음에 의한 이신칭의를 강조한 반면, 가톨릭교회는 ‘믿음과 함께 선행’을 주장하면서 양측이 다른 길을 가야 했다.

그러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善)을 행할 힘을 주시고, 또한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는 칭의론에 루터교와 가톨릭교회는 공동성명을 추구하였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화되고 성화된 사람들은 그들의 삶 전체에서 유혹과 죄와 싸우게 되고 그 싸움을 통해 인간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힘을 물리치는 복음의 약속으로 더욱 강해진다.”고 선언하며, 7500만 교세를 가진 세계 감리교가 동참한 것이다. 감리교회가 공동합의에 이른 몇 가지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는 루터와 가톨릭교회의 의인화 교리를 아우르는 매우 독특한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인한 구원과 신앙적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의인화 논쟁을 웨슬리는 그의 중심 사상인 ‘선행 은총’(先行恩寵 Prevent Grace)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웨슬리의 신학에 기초하여 합의하게 되는 핵심 내용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善)을 행할 힘을 주시고, 또한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로 요약된다.”

이러한 결과가 있기까지 양편에서 나름대로 진지한 대화가 있었다. 루터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1986년 ‘루터교-로마 가톨릭 합동위원회’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몇 차례의 모임 끝에 1993년에 의화 교리에 관한 문헌의 초안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1994년 합동선언문 초안을 작성했으며, 1997년 합동선언문은 완성했으나 공식 발표는 연기되었다. 그러던 중 1999년 10월 31일 독일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에서 당시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위원회 카시디 추기경과 루터교 세계연맹의 크라우저 회장이 칭의론에 관한 합동선언문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일치에 이르지 못한 교리부분에 대해 언급이 국한되었지만, 당시 루터교와 가톨릭교회 간 작성된 ‘칭의론에 대한 공동 성명’은 44장으로 된 비교적 짧은 문서였는데, 그 중 40조 같은 경우는 공동선언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교 신앙과 로마 가톨릭 해석의 차이점을 솔직히 수용하고 근본진리에 있는 합의들을 더 이상 들추어내지 않는다.” 이러한 공동선언에 대해 독일의 루터교회는 많은 문의를 하고 문제점을 들추어내기 시작했는데, 결정적으로 제기된 핵심은 로마가톨릭교회가 16세기 종교개혁 구원관을 진리로 인정하지 않은 점이었다.

이에 독일 개신교신학자 165명이 공동성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고, 독일 루터교회 13개 주 교회 중 유일한 바이에른 주만이 공동성명에 무조건 동의를 했으며, 3개주는 완곡한 거부를, 9개주는 ‘선별적 동의’를 표했을 뿐이었다. 이 결과 교황청은 1998년 6월 25일 완전한 합의가 아님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결과 공동선언은 교리문제는 미해결된 채로 반쪽 공동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나아가 1999년 10월 독일 대학교수 255명은 공동성명에 공개적 반대를 표하면서 신구교 대표들의 서명을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곧 양측 간 교리의 일치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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