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르포] 일본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아픔, 미래를 품은 나가사키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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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르포] 일본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아픔, 미래를 품은 나가사키 순례길
  • 이덕형 기자
  • 승인 2012.10.17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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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의 성지 나가사키 순례길을 가다 (하)

▲ 나가사키현 순례길을 따라 긴 시간 내려온 일본그리스도교 신앙의 모습은 방문한 순례자에게 지금까지 걸어온 일본 기독교 역사의 아픔과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보여준다.

400년 간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가쿠레 키리스탄. 금교령의 시대를 거쳐 살아남은 잠복 크리스천은 종교자유를 얻었지만 전체 중 30퍼센트만이 구교로 돌아갔고 남은 70퍼센트는 아직도 잠복 그리스도교인으로 살고 있다.

성화 밟기를 뜻하는 ‘후미에’와 라틴어 기도문 ‘오라쇼’. 나가사키현이 추진 중인 교회당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록과 순례길 프로젝트. 두 순례길 과정을 거치며 나가사키순례길기자단이 마지막으로 만나게 된 것은 가쿠레 키리스탄이었다. 흔히 잠복 크리스천으로 알려진 그들은 일본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지금까지 이어온 산 증인이다. 문화유산이 추진 중인 교회당뿐만 아니라 박해 시 나가사키현, 특히 고토시 내 도서 지방으로 흩어진 역사의 중앙에는 언제나 그들의 순교와 희생이 뒤따랐다.

기자단이 5일간 마지막까지 밟았던 길. 가쿠레 키리스탄이 256년간 눈물과 한숨으로 열어간 그들의 인생길을 살펴보았다.

# 가쿠레 키리스탄
‘가쿠레루’. 일본말로 ‘숨다’는 의미다. 시기적으로는 기리스탄 금교령이 발표된 1614년부터 금교령이 철폐된 1873년까지 260여 년간 일본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기독교 지도자가 없었던 시대를 말한다. 그래서 일본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들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가쿠레 키리스탄들은 목회자 없이 각 지역에 흩어져 자체 신앙 지도자를 중심으로 오랜 시간 명맥을 유지해왔지만 내려온 시간이 길었던 만큼 예수회가 전한 복음도 변형되어 갔다. 오오우라 성당에서 1865년 ‘신도발견’ 사건이 있을 때까지 그들은 자체적으로 신앙을 지켜갔다.

오랜 시간 동안 생겨난 이질감 때문인지 몰라도 한 지역 통계로는 금교령 철폐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이후에도 전체 가쿠레 키리스탄 중 30퍼센트만이 구교로 돌아갔고 70퍼센트는 그대로 가쿠레 키리스탄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남은 가쿠레 키리스탄 중 14퍼센트 가량은 아직도 다가올 고난에 대비해 자신을 숨긴 채 잠복 크리스천의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이키쯔키쵸 섬 박물관에는 가쿠레 키리스탄의 생활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돼있다.

# 이키쯔키쵸 박물관과 쿠로시마 섬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시 이키쯔키쵸 섬에 가면 잠복 크리스천의 생활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키쯔키쵸 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예전에 고래가 많이 잡히던 곳으로 유명한 이곳에는 현재 총 6천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그 중 구교는 300명, 잠복 크리스천은 500명 가량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리구치 히토시 씨는 “가쿠레 키리스탄은 교회당에 가지 않고 30호 가량 한 조가 되어 조장의 인도하에 가정예배를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라틴어 기도문과 함께 전해진 교회력 덕분에 사순시기 및 성탄절을 비롯해 주요 절기는 지키지만 그중에는 태풍이 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 및 밭농사 기도와 같이 주기적으로 열리는 절기기도가 포함됐고, 신앙에도 변형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와 관련 “카쿠레 키리스탄은 박해와 혹한의 시대를 거치며 신토와 불교도 함께 믿게 됐다”고 그 원인을 분석했다. 그리스도교가 허락되지 않던 시절 많은 카쿠레 키리스탄은 불교도와 신토 신자로 자신의 모습을 숨기며 신앙을 이어왔는데 그 가운데 변형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쿠로시마 섬의 경우 불당을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마리아 관음상이 불상 안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예전 소나 말의 방목지로 인적이 거의 없던 쿠로시마 섬에 카쿠레 기리스탄이 핍박을 피해 불교도로 몸을 숨기고 들어간 경우다. 한 때 2천4백 명 되던 주민은 현재 479명이며 그 중 구교 신자는 400여 명 정도로 알려졌다. 현재 섬 주민의 50퍼센트 이상은 70대 이상이다.

다른 신앙 안에 일본그리스도교 신앙을 감추는 과정과 그렇게 흘러내려 온 시간 속에 신앙이 변형된 면모를 보여준다. 그래서 카쿠레 키리스탄 후손 중에는 금교령 시대 선조의 목숨을 지켜준 불자나 다른 종교인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카쿠레 크리스탄이지만 불교 스님으로서 불당을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장주 선생은 카쿠레 키리스탄에 전승된 라틴어 기도문 ‘오라쇼’(Oratio)에도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고 소개했다. 뜻도 모른 채 260년간 전승된 라틴어 기도문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 교수의 연구에 의해 밝혀진 오라쇼는 전승된 민간 기도문의 어원을 찾는 과정에서 그 기원이 라틴어 기도문에서 비롯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오랜 핍박 속에 신앙 지도자 없이 기독교가 전해졌을 때 어떤 과정과 어려움이 남게 되는지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라는 의견을 나타냈다.

▲ 와카마츠 섬의 키리스탄 동굴은 고토 핍박을 피해 몸을 숨긴 신자들의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 와카마츠 섬 내 키리스탄 동굴

흩어진 신자들. 사리진 키리스탄은 핍박을 피해 어디까지 숨어 들어갔을까. 나가사키현 고토시 도서지역에는 당시 핍박을 피해 물도 식량도 없는 곳으로 신자들이 피해 간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 중 와카마쯔섬에서는 신자들이 몸을 숨긴 키리스탄 동굴을 만나 볼 수 있다.

모진 핍박을 피해 도망치고 쫓겨 몸을 숨긴 곳은 날카로운 해안절벽 사이에 난 동굴이었다. 방문 시 동굴을 무사히 다 볼 수 있는 확률은 절반 정도. 이곳은 날씨가 좋아야 그나마 접근이 가능하며 전경도 볼 수 있다.

고토 핍박을 피해 동굴로 몸을 숨긴 신자들은 여러 끼니를 거른 뒤 참다못해 구해온 식량을 먹기 위해 모닥불을 피우웠고 결국 발각돼 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키리스탄 동굴 입구 위에는 그때 신자들의 신앙을 기념하기 위해 예수 십자가 상이 세워져 있다.

# 과거 성시화 중심도시 시마바라
나가사키현 시마바라 시는 고토시와 함께 많은 기독교 유적을 담은 도시다.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영주로 있던 이곳은 기리스탄 금교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많은 일본그리스도교인이 신앙을 지켰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주가 바뀐 후 가혹한 그리스도교 탄압 정책과 축성을 위한 가렴주구의 세금 정책으로 ‘시마바라 난’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1637년 일본 그리스도교 농민의 봉기로 시작된 난에는 3만 7천여 명이 넘는 백성이 참여해 최총 목표인 시마바라 성을 공격하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농민군은 인근의 폐성인 하라성에 들어가 농성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638년까지 버텼지만 하라성이 막부군 12만 명에 의해 함락당할 때에는 부녀자를 포함해 3만 7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이 전부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설에 의하면 성이 함락되던 날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는데 남은 한 명은 막부 측에서 파견한 스파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치열했던 전투로 하라성 일대에는 지금도 흙을 얼마 파지 않아도 인골이 발견되며 아직까지도 발굴이 진행 중이다. 발굴된 유물 중에는 총알을 녹여 만든 십자가가 많이 출토됐다.

일본 그리스도교 농민군을 이끈 지도자는 당시 16세였던 아마쿠사 시로 토키사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신이었던 아버지 마스다의 영향을 받아 그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전해진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 측에 섰던 그의 아버지는 전투에서 패한 후 시마바라 지역으로 몸을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라성 유적 일대에는 그를 기념하는 동상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함께한 가톨릭 기자단과 이장주 선생은 시마바라의 난을 성전과는 구분돼야 한다고 말했다. 시마바라 난과 거기서 사라져간 일본 기키스탄인들을 순교자로 보기에는 논란이 있다는 것으로 신앙과 전쟁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 시마바라 교회당을 방문하면 금교령이 발표된 후에도 신앙을 유지하다 순교한 바오로 우치보리 사쿠에몬의 가족 동상을 만나볼 수 있다.

# 시마바라 교회당

정갈한 형태의 교회당. 외관만 볼 때 베이지 색 벽과 기둥에 남청색 둥근 지붕을 확인할 수 있는 시마바라 교회당. 이곳을 방문하면 바오로 우치보리 사쿠에몬의 가족 동상을 제일 먼저 만나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금교령이 선포된 후에도 신앙을 유지한 아리마의 가신 바오로 우치보리 사쿠에몬 가족의 순교사에 관한 것이다. 막부에서 온 새 영주 마츠쿠라는 충신이었던 우치보리 사쿠에몬이 금교령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자 1627년 우치보리 사쿠에몬의 가족 4명을 포함해 총 15명의 신자를 한겨울 인근의 아리아케 바다에 던져 수장시켰다.

이리구찌 히토시 씨는 “겨울 바다에 빠져서도 헤엄치지 못하게 하려고 영주는 바다에 넣기 전 사람들의 손가락을 다 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어 “그때 수장되어 순교한 우리보리 사쿠에몬의 세 아들 중에는 5살 난 이구나치오도 있었다”고 전했다.

동상 한 가운데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잘린 손을 들어 보이는 5살 난 이구차치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교회당 입구에도 당시 순교한 이구치오를 기념하듯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가족의 순교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바오로 우치보리 사쿠에몬은 시마바라에서 운젠까지 고난의 길을 걸은 뒤 운젠에서 순교했다.

▲ 카레마쯔 신사 내 비석에는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세 가지 징표가 숨겨져 있다. 카레마쯔 신사는 현재 가구레 키리스탄의 후손이 지키고 있다.

# 카레마쯔 신사

시마바라 순교역사를 뒤로한 순례길의 여정은 카레마쯔 신사에서 그 막을 내렸다. 나가사키현 사적으로 지정된 이곳은 전설적인 전도사 바스찬의 스승 산ㆍ지완의 은신처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카레마쯔 신사 인근에는 사순절 가쿠레 키리스탄들이 모여 기도렸다는 바위와 가쿠레 키리스탄들의 무덤이 있다.

카레마쯔 신사는 겉으로는 신사의 모습이지만 신사 내 위치한 비석을 닫을 때는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세 가지 징표를 확인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현재 이 신사는 스님으로 있는 가쿠레 기리스탄 후손인 마츠카와 다카하루 씨(73세)가 관리하고 있다. 그는 카쿠레 키리스탄이자, 스님으로 현재 카레마쯔 신사를 관리하고 있다.

“세례명도 있지만 잠복크리스천 계율 상 자신의 세례명을 밝히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말한 그는 “환란의 시기 선조를 지켜준 불교에 보은하는 차원에서 스님으로 있지만 집에 돌아가면 400백여 년 간 이어진 가쿠레 키리스탄의 전통을 지켜가는 지도자”라고 말했다.

얼마 안 남은 가쿠레 키리스탄인 그는 전통을 젊은이들에게 이을지 여부에 대해 확답을 하지 않았지만 전통이 계속 이어내려 갈 여지를 시사하는 말은 몇 차례 언급했다.

후쿠메와 오라쇼, 나가사키현 유네스코 순례길 프로젝트, 카쿠레 키리스탄. 세 단어는 일본 그리스도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준다. 세 단어가 갖는 시사점은 입장에 따라 여러가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선교에 있어 신학교 문제의 필요성이나 북한 지하교회에 대한 지원책 문제, 일본 선교 시 문화적으로 고려해야할 사항, 지역 사회와 교회의 공생관계 등이 그것이다. 나가사키 순례길 방문을 통해 기자단이 느낄수 있었던 가장 큰 점은 신앙과 역사속에 인도하심 이었다. 50만 일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 부흥이 순례길을 따라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도 주목해봐햐 할 점이다.

이와 함께 나가사키현 순례길을 따라 긴 시간 동안 이어 내려온 일본그리스도교 신앙의 모습은 방문한 기자단에게 일본그리스도인들이 걸어온 역사와 아픔 그리고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함께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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