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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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0.1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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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신학 이야기 (43)

“진리를 알면 진리 자체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자유로움이 곧 거짓이 아닌 나의 한계를 아는 매우 자연스러움이다. 절대로 잘하겠다는 결심이 아니기에 하지 못함에 대한 솔직함이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이다. 진리를 외치나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진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나 자유로움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가 재미없다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명기 6장 5절부터 나온 말씀을 쉐마라고 하여 그 본문대로 가르침을 받았기에 달달 외우기는 했다. 그래서 사사기 2장에 나타난 6절부터 보면 이스라엘 즉 여호수아의 세대가 다 죽은 후 후대들이 어떠했는가.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딤낫 테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지금도 쉐마를 중심해 훈련된 사람들은 유대교로 남아 예수님의 초림도 믿지 않는 집단적 사람들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고정관념에 묶여진 사마리아여인의 갈증을 해소하셨는데 저곳도, 이곳도 어떤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심이 곧 이때라는 사실을 말했는데도 사람들은 깊은 잠에 취해 거짓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현장으로 너무 쉽고 단순한 만남인데 사람들은 지금도 쉐마에 매달려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여호수아는 무엇을 했는가? 단 자기주변도 알지 못하는 한 길만 달려갔는가? 후세대에게 무슨 영향력을 주었는가. 구약성경에 나타난 사람들의 모순된 삶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말이다.

지금도 우리는 칭찬을 얻기 원한다. 성과위주로 자기주의적 형식에 매여 있다는 증거로는 과장 소위 현대말로 ‘뻥’을 친다. 더 위험한 것은 하나님의 아무 감각 없으신 사실을 사람들이 부풀려 오르게 하는 습관을 예수님처럼 살 수 없는 원인이 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강단에서나 사람들에게나 그보다 불신자들에게 토해내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극단적 표현이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알면 ‘뻥’칠 이유가 없다.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갚을 수 없는 짐을 지고 분에 맞지 않는 내가 만들어놓은 그럴듯한 집에서 살면서 나는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그것 자체도 하나님은 거짓말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을 주판알 튕기듯 그리고 요절을 거미줄 뽑아내듯 사람들이 천재라고 할 정도로 짝을 잘 맞춘다고 해도 하나님은 거짓행위로 보신다고 생각해 보았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예수님처럼 사는 삶은 진실이다. 진실의 반대는 거짓이라면 거짓은 분명히 성경에서는 사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모형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이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라고 말한다. 거짓의 대가는 죽음이다. 그 죽음의 삶을 사는 목회자들의 죽을 맛이라는 목회적 고생을 말하는 것 그 자체일 것이다. 목회는 고난이 아니다. 죽음의 삶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결혼의 죽음은 거짓가정이라고 하여 “나무의 밑동을 갉아먹는 흰개미이다”라고 했다. 양심의 죽음을 두 번째 거짓말의 비극이라 했습니다. 그 죽음은 첫 번째 거짓말보다 쉽다고 한다. 직업의 죽음은 거짓말이 치명적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지 부정행위로 쫓겨난 학생과 공금횡령으로 해고된 직원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경험한 것 자체 속에 내가 속해 있다. 믿음의 죽음은 믿음의 언어와 거짓의 언어는 사용하는 단어가 완전히 다르다. 거짓의 언어에 유창한 이들은 자백, 회개 등의 단어를 발음조차하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그밖에 친밀의 죽음, 신뢰의 죽음. 평화의 죽음, 신용의 죽음. 자존심의 죽음. 목회자가 체험하는 죽음의 제목들에 매우 만성된 환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죽음을 고난이라는 미사어구로 사명에 연관시키는데 능숙해져 있다면 절대로 예수님처럼 자유로움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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