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척 어렵다 해도 한우물 파면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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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척 어렵다 해도 한우물 파면 성공합니다
  • 이석훈 기자
  • 승인 2012.09.2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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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중소도시 목회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주는 ‘양문교회’

두 차례 시련 극복 후 지역교회와 주민 섬김이 오늘의 영광과 축복
쉬운 설교로 초신자·젊은이 적응 … 찾아가는 도서관 · 미래교육부 운영

충남 아산시 용화동에 위치한 양문교회(담임:이승수 목사, 041-545-1934)는 개척교회와 중소도시 교회 목회자들에게 ‘한우물을 파면 된다’는 신념으로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다.

양문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안 된다”고 했을 때도 “된다”고 외치면서 23년간 한우물을 파 여기까지 왔다. 무엇이 양문교회의 오늘을 가능하게 했을까?

# 교회 개척 후 시련과 축복
1989년 10월 이승수 전도사와 김미자 사모는 용화동 마을회관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강원도 강릉 출신의 이 목사에게 당시 온양은 와 본 적도,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낯선 곳이었다. 더구나 결혼한 지 불과 7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신학교 4학년 학생 때였다. 월세 6만원의 가난한 신혼부부였지만 결혼축의금과 전세금으로 성구와 종탑 등을 준비했다.

개척 당시 교단 교회는 충남노회에 8개 밖에 없었고 온양에는 단 한 교회도 없던 때였으니 다른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마을 지도자들로부터 십자가 종탑을 제거하라는 강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 때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찬양을 드리며 주님을 의지했다. 온양이 온천 도시이나 가난한 개척자에게는 그저 사치에 불과했기에 싱크대에서 머리를 감아야 하는 것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험이 일천한 젊은 전도사에게 이와 같은 사역의 현장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성도는 좀처럼 오지 않았고 급기야 한 사람이라도 보내주시면 온양에서 목회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주일이 지나 작정한 월요일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떠나라는 신호를 주시는 것이라 체념하고는 학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 때 사모에게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한 택시기사가 왔는데 월요일임에도 교회에 나와 등록을 하고 갔다는 것이었다.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결국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온양 땅을 떠나지 않고 지금껏 한 자리에서 사역할 수 있었다.

“그 땐 정말 떠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로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저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지요.”

개척 한 지 2년이 되어 성도는 20여 명으로 늘었지만 집사는 한 사람에 불과했고 한글을 모르는 성도들도 많았으며 반찬을 해줘야 할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순간순간 부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행복한 삶이었다. 그러나 양문교회에 큰 시련이 두 차례 찾아오게 된다.

첫 번째 시련은 한 성도의 딸이 가정 문제로 가출을 했지만 그 원인을 교회와 담임 전도사에게 뒤집어 씌워 교인 두 사람만 남고 전부 떠나게 된 일이었다. 이 목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인간에 대한 회의로 심한 좌절에 빠져 한동안 목회를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남은 성도 둘과 이 목사, 그리고 아내까지 네 사람은 40일 작정기도를 통해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고 불과 몇 달 만에 40명이 넘는 성도로 부흥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게 됐다.

두 번째 시련은 성전 부지를 구입한 후 찾아왔다. 1992년이 되던 해 성도 수가 40명이 넘자 마을회관 공간으로는 모두 수용하기 힘들어졌다. 회의 끝에 성도들이 모아준 건축헌금 2,600만원으로 새로 지은 건물 지하로 교회를 이전했다. 점차 전도의 결실을 맺기 시작했고 이 목사는 3년 간 이슬비 전도 강사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더불어 교회는 부흥했으며 급기야 1997년 8월 816평의 성전 부지를 구입하는 등 교회 건축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IMF가 터지면서 과도한 이자로 고통이 가중됐다. 땅은 매매되고 교회는 비닐하우스로 이사하게 되었으며 성도들은 대부분 떠나고 말았다. 이 때 또 한 번 목회 포기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다시금 하나님의 위로가 임했다. 2000년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지하실 교회로 옮겼고 온 성도가 한마음되어 열심히 전도하여 결국 2002년 2월 2일 지금의 예배당을 짓고 입당하게 됐다.

기도원에 다녀온 한 남자 집사가 “왜 우리는 교회를 짓지 않는가”라고 한 말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여 힘을 모은 결과였다. 10원도 없이 시작한 공사였지만 결과적으로 10억이 넘는 건축을 완성하게 됐다. 실망과 좌절감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통한 반전의 축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는 계속된 부흥과 성장을 이루어갔고 교회의 영향력은 지역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 설교에 초점 맞추는 목회
23년간 한 노회, 한 지역에서 목회한 이 목사와 양문교회에 하나님은 많은 결실로 응답하셨다. 양문교회를 밑거름으로 개척 당시 노회 교회가 불과 8개 밖에 되지 않았지만 현재는 91개 교회로 발전했고, 아산 지역 역시 교단 교회가 하나도 없었던 초기에 비해 지금은 25개가 넘는 숫자로 성장해 있다.

또한 담임목사 개인에게도 많은 역할들이 주어졌다. 시찰과 노회 뿐만 아니라 교단의 총회 부서기 및 회의록 서기와 아산시기독교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아산시기독교연합회관 건립추진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백석대학교 총동문회 사무총장과 총회 헌법위원장, 그리고 충청남도 기독교연합회 대표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아산을 넘어 16개 시·군 연합의 충청남도 교계를 대표하는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최근에는 백석 신학대학원에서 헌법/행정 강의를 통해 학생들과 소통하는 등 그의 활동 영역 확장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묵묵히 한 길을 걸어간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험난하지만 한 우물을 팔 때 그 끝에 주님이 계시고, 그 분이 결실을 주시며, 비로소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목사는 목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으로 ‘설교’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쉽다. 교회 처음 나온 사람이 들어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설교를 지향한다. 실제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핵심이 되는 포인트 하나를 잡아 본문을 중심으로 깔끔하게 논지를 진술한다. 그 비결을 ‘독서’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새벽 기도회를 마친 후에 신문 2-3개를 꼼꼼히 읽는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들을 성경에 입각하여 정리하고 필요한 부분들은 빠짐없이 메모한다. 베스트셀러는 꼭 챙겨 보고 바쁜 사역 일정에서도 틈틈이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현장 목회에 소금처럼 스며들어 적절하게 짠 맛을 내주는 것이다. 많은 독서가 결국 성도들의 삶을 세밀하게 다듬어 줄 수 있는 설교로 재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양문교회는 23년의 세월 동안 한 번도 교회 내의 분쟁, 다툼, 갈등을 겪지 않은 ‘화목한 교회’임을 자랑하고 있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성령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를 제시했고 교회는 이런 토대 위에 가족 같은 공동체로 성장해 왔다. 양문교회는 늘 개방되어 있어 누구든 들어와 기도하고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언제 교회를 가 보아도 성도들의 기도와 따뜻한 교제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지역아동센터’를 통해 어린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등 지역 주민들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교회 1층에 카페 겸 ‘찾아오는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베스트셀러를 비치하는 등 독서 환경 조성에도 힘쓰고 있으며, 미래를 선도하고 기독교 리더십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 부서인 ‘미래교육부’를 두어 진학상담과 각종 입시 정보 제공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 지역과 함께하는 교회

양문교회는 한국 교회 미래인 학생들의 장래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Book On, Tv Off’,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책을 열면 미래가 보인다’를 모토로 삼아 이 시대를 이끌어갈 리더를 세우는 일에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 같은 열정은 점차 결실을 맺어 현재 미국, 아일랜드, 캐나다, 칠레 등 세계 곳곳에 양문의 젊은이들이 진출해 있고 좋은 대학에도 꾸준히 진학하고 있다.

또한 양문교회는 6개월 간격으로 다양한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주일에 온 성도들이 참여하는 신앙강좌를 담임목사와 교수들이 강사로 신앙강좌를 열고 있으며, 성경공부와 함께 말씀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농촌봉사활동과 해외선교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주일 신앙강좌 후 악기교실을 열어 모든 성도들이 하나의 악기를 다룰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써 교회와 성도들의 자랑이 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승수 목사와 양문교회를 자리잡게 하는 건 바로 ‘연합 사업’에 있었다. ‘내 교회’가 잘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교회’가 잘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는 바람직한 자세라고 강조한 결과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교회만이 아니라 시찰, 노회, 총회, 아산시 기독교연합회, 그리고 충청남도 기독교연합회가 잘되는 것이 중요하며 더 나아가 한국 교회 전반이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열방을 향한 더 큰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담임목사의 목회 철학이 교회에 스며든 것이다. 양문교회는 실제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부탁도 마다하지 않고 교회를 내어 주었으며 연합을 위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양문의 성도들 모두가 각양 은사대로 이 일에 동참하기를 힘써왔다.

동료 목회자들은 양문교회에 대한 질문에 주저없이 ‘최고’라고 입을 모은다.
김정구 충남노회장은 “이 목사는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십이 탁월하고 안목이 뛰어나다. 그러면서도 모든 일을 화목하게 이끌어가는 훌륭한 목회자이다”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개척시절부터 오랜 시간 지켜봐왔던 이덕희 증경노회장도 “선후배 할 것 없이 배려하고 섬기는 그의 성품 덕분에 교단에서 가장 단합이 잘되는 노회로 인정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양문교회 성도들도 말씀에 잘 양육되어 있어 교회뿐만 아니라 지역을 위해 헌신하는 아름다운 공동체”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노회원들 역시 “현재까지의 삶을 볼 때 앞으로 이 목사와 양문교회는 더 큰 일을 감당할 만하다” “개인적인 이익보다는 조직의 발전을 바라는 마인드가 탁월하다”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사랑이 많은 목회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최근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적으로 개척교회가 줄어드는 현상에 대해 이 목사는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개척 교회는 어렵다고 말합니다. 더군다나 지방 중소도시에서 목회에 성공한다는 것을 뜬 구름 잡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된다고 하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안 된다고 하면 안 됩니다. 개척 교회, 중소도시 목회도 분명히 희망이 있습니다.”

23년간 한 길을 걸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묵묵하게 사명자의 길을 걸어온 이승수 목사.
그는 현재 자신이 맛보고 있는 축복의 열매들은 바로 이와 같은 인내와 시련을 통과한 결과라고 힘주어 말했다.

“저는 슈퍼스타가 아닙니다. 제가 섬기는 양문교회 역시 대형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개척을 망설이는, 특별히 지방 목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 희망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현재 개척 교회를 섬기시는 분들도 저를 보면서 희망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좌절하지 마십시오. ‘1년에 1명 전도, 1년 1명 성장’의 심정으로 간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낙수가 바위를 뚫듯 묵묵히 한 길”

아산양문교회 이승수 목사

이승수 목사는 많은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할 때 ‘된다’ 고 외치는 목회자다. 개척에서부터 23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한 적이 없었다. 한 방울이지만 끊임없이 떨어지는 낙수(落水)가 바위를 꿰뚫는 것처럼 묵묵히 한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교계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그는 지금도 개척교회, 특별히 중소형 지방도시의 개척이 ‘된다’ 고 주장한다.

이승수 목사는 사랑받는 목회자이며 동시에 존경받는 남편이자 아버지이다. 그는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목회자이다. 고된 사역의 현장에 있으면서도 노부모와 장모를 함께 섬겨왔으며 현재도 연로하신 장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 확장에 매진하는 그에게 자녀의 복을 선물로 주셨다.

슬하에 1녀 2남을 두고 있으며 큰 딸은 올해 법대를 수석 졸업하고 로스쿨 진학 준비를 위해 현재 미국 유학 중에 있다. 둘째 아들은 신학대 4년 전액장학생으로 지금은 최전방에서 군복무 중이며, 막내 아들은 NGO활동을 꿈꾸며 미래를 준비하는 고등학생이다. 그는 이런 자랑이 혹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걱정스러워 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한 결과 가정과 자녀의 축복을 주신 것이지요. 저는 과감히 지방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하나님은 자녀 교육을 해결해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지켜 준 아내의 내조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그의 활동영역 확장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내는 지금까지 저의 의견을 단 한 번도 존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불만이 많았을 텐데 내색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미안한 마음이 크지만 그보다 정말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주님을 바라보며 한 우물을 판 꾸준한 사역자. 요한복음 13장 1절의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

사명의 길을 목숨 걸고 걸었던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은 가정과 목회 영역 전반에 걸쳐 지금도 흘러넘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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