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소리에서 가슴으로 전달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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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소리에서 가슴으로 전달되는 것이죠”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2.09.1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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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50년’ 테너 박인수 석좌교수 인터뷰

1989년 한국의 대표적인 가곡 ‘향수’(정지용 시, 김희갑 작곡)를 통해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하모니를 선보이며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은 테너 박인수 교수(백석대학교 석좌)가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아 지난 10일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념음악회를 마련했다.

▲ 테너 박인수 교수(백석대학교 석좌)가 데뷔 50주년을 맞아 제자들과 함께 기념음악회를 개최했다.
박인수 교수는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1962년 대학교 3학년 때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 독창회로 데뷔했다. 해외에서 수백 편의 오페라 공연과 콘서트에서 여러 가지 장르의 음악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국내에 들어와 서울대학교에서 20여 년, 백석대학교에서 10년을 제자 양성에 매진하면서 후학들을 길러냈다. 30여 년 동안 그에게 수학한 제자들은 지금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노래 인생 50년을 회고하는 음악회 성격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제자들과 함께 어우러져서 무대를 꾸미게 돼 기쁩니다.”

이번 50주년 기념 음악회는 제자들의 적극적인 권유와 참여로 성사됐다. 이번 음악회에서 그는 제자 20여 명과 함께 무대를 준비했다. 특히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테너 박현재, 신동원, 김성준 등 실력파 성악가들이 무대를 꾸몄다. 박 교수는 “50년을 구약성경에는 ‘희년’이라고 부른다. 유대인들은 이날 모든 빚을 청산하게 된다”면서 “신앙인으로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빚을 청산하고 내려놓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이미 해외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그였지만, 1989년 대중가수 이동원과 함께 부른 ‘향수’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박 교수는 “처음 정지용의 시집에서 ‘향수’라는 작품을 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국민의 시구나 하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면서 “대중가요 작곡가인 김희갑 선생이 곡을 붙여서 나온 것을 보고 너무 좋아서 며칠 후에 바로 녹음을 했다”고 말했다.

당대에 그는 대중가수와 함께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클래식계에서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향수’는 불과 1년 만에 130만 장이 팔리는 흥행기록을 세우면서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이끌었다는 호평이 뒤따랐다.

음악가라면 누구나 대중들에게 박수갈채를 원한다. 박인수 교수는 이를 두고 “연주가들에게 꼭 필요한 허영심”이라고 모순적으로 표현했다. 박수갈채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왜 음악을 하는지. 순전히 나를 위해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표현한 허영심을 가장 만족시켜준 무대로 그는 남미 콜롬비아에서 선보인 오페라 ‘라보엠’을 꼽았다. 당시 콜롬비아 국영방송에서 오전 시간대 모든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오페라를 생중계했다고 한다. 이날 박 교수는 오프닝 무대에서 ‘그대의 찬 손’ 아리아를 선보였다. 그는 “당시 오페라를 계속 진행하지 못할 만큼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다음날 택시기사는 물론 식당에서 만난 손님들도 나를 보고 박수를 쳤다. 나를 흡족하게 만든 박수갈채였다”고 말했다.

그에게 음악의 진정한 의미를 전해준 공연도 있다. 1991년 전주에 있는 직업훈련원에서 마련한 무대였다. 그는 “하루 종일 밥만 먹고 일한 남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이들이 클래식 음악에 어떻게 반응할지 솔직히 겁이 났다”면서 “그러나 의외로 엄청난 반응을 얻었다. 일상에 지친 아이들은 진정성을 가지고 노래를 좋아해줬다”고 말했다.

“음악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음악은 지식이나 소양을 갖추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에 의해서 직접 가슴으로 전달되는 것이죠.”

이날의 경험이 그에게 음악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줬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한국적인 클래식 음악을 개발하는 연구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1978년 미시건주에서 독창회를 하면서 우리 가곡을 삽입해 노래를 불렀다. 무대가 끝난 후에 한 사람이 찾아와 “그 노래가 어느 나라 곡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박 교수는 “순수한 우리 가곡”이라고 설명했고, 그는 “멜로디는 아름다운데 서양음악 아니냐”고 반문했다고 했다.

“그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잠깐 사이에 그의 입장을 받아들이게 됐죠. 가사만 우리의 것일 뿐 반주나 형식은 모두 서양음악이지 우리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때부터 그는 우리의 전통음악인 창과 판소리를 대상으로 실험적인 음악을 연구하고 선보였다. 1990년대에는 클래식 노래로 민요곡집을 녹음했고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목을 쥐어짜는 소리에 거부감이 있던 외국인들도 맑은 소리로 부르는 창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가 처음 노래를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니면서부터다.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성가대를 자원했고 목사님의 강력한 권유로 음악인생을 시작했다. 박 교수는 “교회가 내 음악의 모태가 됐다”고 말했다.

클래식의 지평을 대중으로 넓힌 그였지만 선정적인 대중음악에는 단호했다. “음악은 무형의 것이어서 잘 보이지 않을 뿐 사람의 정서를 부양시키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대중가요가 고막을 자극하고, 선정적인 노출과 춤으로 관심을 사는 것은 좋지 않은 정서를 자극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는 “클래식 음악만 제일이라고 우쭐하면 안 된다. 그런 의식 때문에 클래식 음악이 대중성을 잃은 면도 있다”면서 “음악은 사람들에게 들려질 때에 존재가치가 있다. 클래식도 대중음악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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