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성호칼럼] 목사님? 장로님? 아니, 형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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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호칼럼] 목사님? 장로님? 아니, 형제님!
  • 옥성호
  • 승인 2012.08.23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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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호의 기독교 문화를 깨운다 (7)

미국에서 상당 기간 살며 나는 정말 악의적으로 목회자를 괴롭히는 성도들을 많이 목격했다. 일례로 자신의 아들이 자기 소속 교회의 담임목사로 오지 않는 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그 교회에 부임할지라도 기를 쓰고 쫓아낼 것만 같은 장로도 있었다.

뭐가 그렇게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누가 오든 왜 그렇게 죽어라 싫어하고 미워하는지 모르겠다. 목회자의 성격이 좀 온화하면 리더십이 없다고 욕한다. 목회자가 뭔가를 좀 강하게 밀어붙이면 건방지고 제멋대로라고 난리를 친다.

정말 다른 직업은 몰라도 목회자라면 ‘복지부동(伏地不動)’하며 생존에만 목을 매어선 안 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말로 튀지 않아야 하는 목회, 그저 정해진 틀 안에서 교인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눈치를 발휘해야 하는 목회, 크게 불평하는 소수가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조심 이끌고 가야 하는 목회……. 이것이 한인 교회 목회자의 현실이다.

대체적으로 미국에서 목회를 시작하는 경우,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의 어려움을 만난다. 교포들을 상대하다 보면 정말로 ‘목회가 무엇인지?’, ‘목사란 어떤 존재인지?’, 나아가 ‘교회란 무엇인지’를 놓고 씨름하기도 전에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 문제에 시달린다. 미국의 한인 교회는 정말로 쉽지 않은 곳이다. 교회를 자기 개인의 왕국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어딜 가나 꼭 존재한다. 한국 교회에는 교회를 자기 개인 왕국으로 만드는 목회자가 많은 반면 미국 한인 교회에는 오히려 그런 장로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결국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키워드는 ‘좋은 만남’이다. 정말로 ‘좋은 만남이다’라고 할 수 있는 만남들은 솔직하게 나 자신을 드러낼 때 좋은 관계로 이어진다. 달리 말해 선입관으로 시작하지 않은 만남이 좋은 관계를 불러오는 것이다.

만남에서 선입관을 주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 그 사람의 ‘직책’이다. 직책이 그 사람의 정체성 또는 본질(identity)이 되어버리니까. 그렇기 때문에 특히나 처음부터 ‘목사님’과 ‘장로님’으로 시작하는 만남에 어려움이 많은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모든 직책을 다 배제한 채 관계를 시작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긍정적으로 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직책보다 더 상위인 개념, 즉 이 직책보다 더 중요한 정체성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목사가 되기 전에, 내가 장로가 되기 전에, 나를 만든 그 정체성 말이다. 목사이기 이전의 나는 누구이고, 장로이기 이전의 나는 누구인가? 다름 아닌 같은 형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주인으로 모시는 형제다. 어머니에게 목사인 아들은 ‘목사님’이 아니라 ‘아들’이다. 장로를 아버지로 둔 아들이 아버지를 ‘장로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가 ‘형제’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의 만남이 목사님, 장로님으로 시작하기 전에 형제로서 먼저 시작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건강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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