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 금식기도 후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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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 금식기도 후 작사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2.08.2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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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가에서 시상 얻어 “하느님이 보우하사” 신앙고백 담아

애국찬미가선천예배당서 애창가로 불리며 전파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지금까지 작가 미상으로 전해져온 우리나라 애국가의 작사가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라는 증거가 제시됐다.

흥사단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회(위원장:오동춘)는 애국가 작사자 규명 발표회를 앞두고 배포한 자료를 통해 “1907년 3월 7일 경칩 무렵, 안창호 선생이 선천예배당에서 ‘백두산과 두만강물이’의 찬미가가 올드 랭 사인 곡에 불리는 것을 듣고 깊은 시상을 얻어 평양으로 가서 2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며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을 배경으로 하는 ‘애국찬미가’를 작사한 것”이라고 밝혔다.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 선생은 어린 시절 구세학당(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에 재학 중 장로교 세례교인이 됐다. 그는 일제의 심문에서 자신을 기독교 장로파 신자로 밝히기도 했다.

오동춘 위원장은 “그는 4단계 기승전결법을 적용하여 작사한 이 애국찬미가가 국민주권 혁명의식을 고취시키며 전쟁의 발진기지, 공화제 이상향과 모범촌 건설 의지를 담은 문학적 뜻과 사상적 이상이 높은 곡으로서 자신이 조직할 신민회 회원은 물론 민요처럼 널리 불리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애국찬미가는 바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의 최초 노래로 선천예배당과 선천지방에서 애창가로 불려 널리 펴지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사실은 선천예배당 김정수 권사(1894~1976)와 독립운동가 윤형갑(1893~1961)의 증언에 채록되어 있다.

특히 윤형갑은 안창호 선생의 뜻에 따라 이 사실을 숨겨오다 1957년 어느 여름 밤 자신의 종손자인 윤정경에게 안창호 선생의 삶과 애국가 작사자임을 밝히는 증언을 했다. 채록물에 따르면 안창호는 윤형갑에게 “애국가 원작자는 나인데 널리 민요로 정착되어 온 국민이 다 부를 때까지 작사자도 모른 채 뜻풀이도 자유롭게 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미국에 도착해 처음 만난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 황사성 목사가 ‘애국가는 도산(안창호)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며 지은 노래이니 이를 알고 작곡하라’고 했다는 회고기도 증거로 제시됐다.

흥사단은 “김정수 권사와 윤형갑 독립운동가의 목격담, 체험담의 생생한 증언으로 우리는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 선생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 외에도 흥사단은 안창호 선생의 비서실장이었던 구익균 선생의 증언도 증거가 됐다고 덧붙였다.

흥사단은 이어 “선천예배당에서 착상하여 지은 애국찬미가를 안창호 선성은 미국의 클레멘타인 민요처럼 널리 보급시키고 신민회, 흥사단 단우, 국내의 우리 동포들에게 한결같이 독립의 힘을 길러 주권재민의 민족국가의 건설을 이루는 것이 희망이었다”고 말했다.

애국가 작사가는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윤치호 단독 작사설을 심의했으나 찬성 11, 반대 2로 만장일치를 끌어내지 못한 이후 지금까지 미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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