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효성칼럼] 사유하는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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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효성칼럼] 사유하는 쓰레기
  • 방효성
  • 승인 2012.07.2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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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효성의 성지를 찾아서 (6)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세상은 하나님의 창작품이며 그 어떤 것도 피조물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 중 만물을 지배하는 특권을 주신 걸작품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말씀하시고 땅과 하늘과 물아래 있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에게 맡겨 다스린 지금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창조의 질서에 얼마나 순응하며 살아왔는지 생각해본다.

아름다운 이 땅에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사람이 사는 곳엔 어디서나 쓰레기가 생기게 되고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러서는 대량의 쓰레기가 배출되어 지구의 환경을 위협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었다. 현재 인간의 삶에 쓰레기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예전엔 관심도 없고 신경 쓸 것조차 없이 여겨지던 문제였는데 지금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쓰레기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며 물질만능의 시대에 쓰레기라는 물질의 의미를 생각게 한다. 일찍이 이러한 환경문제를 다루며 쓰레기를 작품의 소재로 사용한 적이 종종 있다.

지난해 가을 스위스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사유하는 쓰레기”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를 발표하였다. 가을 하늘에 햇살이 눈부신 호숫가에 철망으로 만들어진 분리수거 쓰레기통이 잔디위에 놓여 있다. 행위자는 관객들에게 주문하였다. “내가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는 동안 누구든지 소지품 중 쓰레기를 한 가지씩 통 안에 넣어주세요” 관객들이 한 가지씩 통 안에 소지품을 넣었다. 장갑, 사탕, 낙엽, 명함, 껌 등 통 안에 쓰레기가 쌓여 갔다. 필자는 쓰레기 통 안에서 밖을 본다.

쓰레기란 무엇인가? 반문한다. 내게 필요 없는 것이 쓰레기요. 어제까지 잘 사용하다 고장이 난 비싼 전자기기도 오늘 쓰레기가 된다. 남이 버린 쓰레기 중엔 내가 찾던 물건도 있다. 어디까지가 쓰레기인가? 스스로 쓰레기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쓰레기는 선택된다. 밖에 있는 물건이 쓰레기통이라는 곳에 옮겨지면 쓰레기가 된다.

조금 전까지 예쁘게 포장된 상품의 포장들이 구매자에 의해 찢겨나가며 곧 쓰레기가 된다. 먹고 입고 쓰고 남은 찌꺼기가 쓰레기가 된다. 쓰레기통 안에서 밖을 본다. 내 눈에 비친 수많은 것들 중 쓰레기가 있다. 그러나 쓰레기통 안에 들어온 것만 쓰레기라고 의미지어진다. 쓰레기의 기준이 얼마나 허약한가.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 과연 우리 중 쓰레기 같은 인간은 있을까? 인륜을 파괴하는 악한 사람들과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본다. ‘태어나지 말았다면 좋았을 것을..’이라는 말을 들은 가롯 유다도 있다. 지구상에 많은 악한 것들이 있다. 하나님은 창세기 6장 7절에서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다.

사무엘상 15장에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심을 후회한 적이 있다. 요즘 쓰레기란 말은 재활용이란 다른 말로 사용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도 버릴게 없이 재활용하여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후회는 인간의 후회가 아닌 히브리어로 ‘나함’ 이란 뜻을 가진 의미로 사용된다.

재활용! 하나님은 인간을 돌이켜 재활용 하는 분이시다. 악은 제하되 노아를 통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재탄생시켜주셨다. 우리는 가끔 쓰레기가 되기도 하고 새롭게 재탄생되기도 한다. 오래 참으시고 우리가 구원받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긍휼에 세상은 소망이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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