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의 가능성만으로도 오늘 제 가슴은 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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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가능성만으로도 오늘 제 가슴은 뜁니다”
  • 이덕형 기자
  • 승인 2012.07.11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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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심장병 어린이 2천400여 명 수술한 밀알심장재단 이 정 재 회장

▲ 밀알심장재단 이정재 회장은 “나에게 신앙이란 하나님이 하시면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모금함을 들고 아침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매케한 용접 냄새가 가시질 않는 거리를 뛰어다녔다. 그렇게 공장지대를 돌다 어스름한 저녁녘 공장문이 닫힐 때쯤에는 사람들이 모이는 나이트클럽이나 룸싸롱 안까지도 모금함을 들고 뛰어 들어갔다. 첫 번째 심장병 어린이를 수술하기 위한 돈은 그렇게 모였다.

처음 심장병 어린이를 위해 기금을 모으던 밀알심장재단 이정재 회장의 젊은 시절의 한 단면이다. 2천400여 명의 멈춰가던 심장을 다시 뛰게 한 출발점도 거기서부터였다.

그렇게 1987년 죽어가는 심장병 환자를 위해 설립된 밀알심장재단은 2000년 7월부터 중국 조선족 환자를 시작으로 인도와 몽골, 필리핀, 스리랑카, 베트남, 이집트, 캄보다아 등과 같은 외국인 어린이에게도 같은 마음으로 오늘까지 도움의 손길을 전하고 있다.
 
설립부터 지금까지 이 단체를 이끌어온 이 회장의 하루 수면시간은 4시간. 일 년에 300회가 넘는 집회 덕분에 대한민국을 5번 돌고 외국에는 10번 이상 나갈 정도로 빡빡한 스케줄이 기다리는 삶의 여정. 30여 년간 이어져온 그의 발자국을 뒤따라가 봤다.

# 심장이 다시 뛴다
서울 신림동에 위치한 밀알심장재단. 최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공장지대였던 그 곳은 예전에는 대성연탄공장이 있던 곳으로 더 유명했다. 그 때의 향수를 말해주듯 밀알심장재단 오른편에는 아직도 은성금속 철물점이 위치해 있다. 건물 바로 앞 10m여 미터 지점은 하루종일 지하철이 지나다니는 철도다.

“매일 철도소리와 공장기계음이 넘치던 곳이었습니다. 서울 구로동에서 시작할 때도 9평 사무실에 책상하나 놓고 시작했죠. 사역을 시작한지 30여 년이 흐르면서 여기도 많이 변했네요.”

그가 사역을 처음 시작한 1986년만 해도 심장병은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집을 팔아도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그래서 당시 집에서 심장병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버렸고 결혼한 며느리가 심장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임신을 했더라도 아이와 함께 거리로 내쫓기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회상했다.

“요즘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 심장병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공무원 10년치 월급이 필요했습니다. 집에서 심장병 환자가 발생하면 가세가 기우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결국 환자가 죽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까요.”

하면 망하는 일, 할 엄두도 내지 않던 일을 이 회장이 시작한 동기는 어디부터였을까.

이 회장이 망설임 없이 이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던 동기는 1984년 대우조선에서 야간근무를 하던 중 낙상사고로 24m 높이에서 떨어졌을 때부터 시작됐다. 건물 한층 높이를 3m로 볼 때 당시 그는 8층 높이에서 잔디나 나무 한 그루 없는 맨바닥으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모두 즉사했을 거라 생각했던 사고. 이 회장은 그 때 신앙 체험을 하게 됐고 그 경험이 오늘까지 그를 또 다른 선교 사역의 영역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당시 이 회장이 입은 상처는 이빨 6개가 부러지고 턱 아래 12바늘을 꿰맨 것 뿐이었다.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었는데 너는 네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그 때 제 마음에 울렸던 음성이었습니다. 조용한 울림이었지만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 생명의 무게
그렇게 시작된 심장병 어린이 치유를 위한 사역. 2천4백여 어린이의 멈춰가는 심장이 따뜻한 주님의 마음으로 다시 뛰게 하기 위해 쉼 없이 걸어왔다. 그런 힘겨운 과정을 지나온 이 회장에게도 아직까지 가장 힘들고 잊혀지지 않는 슬픈 순간이 있다. 25년간 수술을 받다 세상을 떠난 아이는 10여 명. 새 생명을 얻은 2천 명에 비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은 적은 수지만 부모의 부탁으로 마지막을 결정하는 그의 손은 언제나 떨려왔다고 고백한다.

“심박ㆍ동 수가 70에서 80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부터는 제 심장이 떨려옵니다. 그렇게 떨어진 수치가 15아래로 내려가면 담당의사가 보호자를 부릅니다. 그리고 부모의 요청으로 중환자실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산소호흡기를 땔 때에는 말로 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옵니다.”

그는 부모가 차마 하지 못해 자신의 손으로 어린아이의 입에서 산소호흡기를 뗄 떼 전해오는 마지막 ‘생명의 무게감’은 평생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할 또 다른 십자가라고 말한다.

반면에 가장 기쁜 순간은 전신마취 후 가슴을 쪼개고 죽음의 터널을 헤매는 3일의 과정에서 아이들이 다시 살아났을 때. 이 회장은 불교, 힌두교 국가에서 온 아이들이 수술에서 깨어나 ‘예수사랑하심은 거룩하신 일일세’라는 찬양이 작은 입에서 흘러나올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심장은 행복으로 요동친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다른 종교를 가진 심장병 어린이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심길 바라는 간절한 이유는 무엇일까.

▲ 밀알심장재단은 지난 5월 몽골ㆍ베트남ㆍ캄보디아 등지에서 심장병어린이 16명을 초청 심장병수술을 진행했다. 수술 후 회복 기간을 거친 어린이들은 지난달 7일과 8일 본국으로 돌아갔다.

# 버림 받는다는 의미
경남 거제도에서 5형제 중 넷째로 태어난 이 회장이 신앙을 처음 접한 때는 유치부 시절. 가정에서 유일하게 신앙을 갖고 있던 셋째 형을 따라 처음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탄치 않은 길의 시작이었다. 큰아버지와 고모가 무속인이었던 집안 분위기에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용납되지 않았다. 지금은 오형제 중 4명이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 당시 예배당에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교회에 가지 말라며 불태워진 성경책만 20여 권. 결국 셋째 형은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집에서 쫓겨났다. 어린시절, 이 회장에게 신앙이 안식으로 찾아온 이유는 가족 내 남다른 차별에서 시작됐다. 차별은 아버지가 네 번째 자식만큼은 딸이길 원했던 바람이 무너졌을 때 찾아왔다. 이 회장은 그 이유로 한동안 이름없이 성장했고 결국 호적에도 늦게 올라 학교생활도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 할 수밖에 없었다. ‘전’자 돌림을 쓰는 가문에서 이 회장 이름에만 돌림자가 빠진 이유도 그의 이름을 면서기가 지어줬기 때문이었다.

“당시 저는 집에서는 쓸모없는 아이, 반에서는 공부 못하는 가난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힘이 되고 격려해주고 나를 세워주는 곳이 있더군요. 동네 있는 교회였습니다. 성도와 전도사님들은 어디서도 인정받지 못하던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습니다.”

이후 장학금을 받고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이 회장은 학교갈 때는 일부러 매일 먼 길을 돌아 교회를 거쳐 갔고 그렇게 하루 두 세 시간 기도하는 생활은 삶의 일부가 되었다.

“어린시절에는 집보다 교회가 더 편안했습니다. 그 때 저에게 교회가 갖는 의미는 두 단어로 말할 수 있겠네요. ‘위로와 평안’ 교회는 제게 그런 곳이었습니다.”

# 나의 가족
예전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이 회장이 가정을 바라보는 눈은 남과는 조금 다르다. 현재 부인과 슬하에 이선교, 이선민 두 자녀를 둔 이 회장은 그 외에도 베트남과 중국 몽골에서 새로온 딸이 세 명 더 있다.

베트남에서 온 부우 씨는 현재 고신대 기독교 교육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지 신학교 신학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중국에서 온 마페페 씨는 13살 때 심장병 수술을 받은 후 지금은 숙명여대 정치외교 학과를 다니고 있고 몽골에서 온 헝거러 졸 씨는 서울여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모두 한 가족으로 밀알심장재단 건물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외국에서 온 세 딸을 공부시키기 위해 둘째 아들에게 검정고시를 추천하기도한 이 회장. 고3인 둘째 아들을 불러 조용히 누나들을 위해 학업 계획을 변경하길 권하던 그는 아직도 망설임 없이 그의 결정을 따랐던 아들들에게 전하지 못한 고마움이 가슴 한켠에 아픔과 미안함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30여 년 전 주님께서 다시 뛰게 허락하신 자신의 심장이 오늘날 두 자식의 가슴에서 다시 뛰고 있음을 확인한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사역이 멈추는 날이 오더라도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는 심정도 함께 내비췄다. 그는 20만 원을 사역비로 받던 전도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온 사역에 함께 해왔던 부인과 자식들이 없었다면 사역이 시작됐어도 이어지기 힘들었을 거라는 속내도 함께 보여줬다.

그런 이정재 회장에게 신앙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하나님이 하시면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모든 일이 된다는 것이 저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수십 차례 넘어졌다 다시 일어난 경험과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난 일에서 저는 부족한 가운데 늘 하나님께 메달리고 기도할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언제나 감사합니다.”

▲ 밀알심장재단은 2000년 7월 중국환자를 시작으로 인도, 몽골, 필리핀, 스리랑카, 베트남, 이집트 등 외국 심장병 환우를 대상으로 심장병 수술 사역활동을 진행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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