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77강) 부활은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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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77강) 부활은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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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6.0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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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두개인들과의 부활 논쟁

주님은 삶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그렇지 못한 것은
결코 삶 혹은 생명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고 교훈했다.

납세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공격이 주님의 지혜로운 답변으로 무위(無爲)로 끝나자 이제는 사두개인들이 바톤을 이어받아 부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주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였다(막 12:18~27).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는 여러 측면에서 달랐다.

우선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비교할 때 수적(數的)으로는 열세였지만, 제사장 계급으로서 귀족들이었고, 부유하였으며, 대제사장을 포함하여 성전의 주요 보직을 맡아 관장하였다(행 4:1).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로마 정부에 적극 협조하였던 공모자들이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었다. 우선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중시하였던 구전 및 랍비들이 전하는 전승 율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부활을 믿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내세도 믿지 않았으며, 천사의 존재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들의 신학의 배경에는 율법, 즉 모세오경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있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그 외에 선지서나 성문서 및 시가서 등 구약의 다른 책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모세 오경에는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사두개인들의 주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에 관한 이들의 질문에는 결국 부활을 인정함으로써 바리새인들과 동조하고 있는 예수님의 신학의 문제점을 폭로하여 그의 권위를 손상시키려는 불순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사두개인들이 제기하는 것은 수혼(嫂婚; levirate marriage, 과부가 고인의 형제와 결혼하는 것)이라는 유대 관습으로, 남편이 죽고 자식이 없을 때 죽은 남편의 형제나 최근친자가 그 과부를 아내로 삼을 의무가 있다는 관습이었다(신 25:5~10). 만일 부활이 있다고 한다면, 내세에서 이 과부는 과연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사두개인들의 의문이고 함정이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 시대에 그러한 법은 거의 시행되고 있지 않아서, 이 질문은 다분히 학구적인 문제로 전락되어 있었다. 사두개인들은 그 계명이 토라(모세 오경) 안에 들어있고, 그리고 그 계명이 부활을 불합리한 것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토라가 내세(afterlife)에 대한 신앙을 배제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사두개인들이 주님에게 돌리고 있는 부활에 대한 순진한 견해를 지지하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망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법적 상속을 위한 자녀 번식의 수단으로써의 결혼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도발적 질문에 대하여 주님은 사두개인들의 근본적인 문제점 두 가지를 지적하셨다. 첫째로 성경에 대한 무지와 둘째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였다. 오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결혼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새롭게 변화시킬 것이며(빌 3:21), 아울러 성경은 부활신앙을 전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이 족장들의 하나님이라 말씀했을 때 그것은 죽은 자들, 혹은 썩은 시체들의 하나님을 뜻하지 않는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인 것이다.

결국 사두개인들은 하늘을 땅의 시각에서, 영원을 시간적 관점에서 이해하려 한 것이다. 하늘, 즉 내세는 현세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며, 시간이 내포하는 모든 육체적 관계를 초월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인 것이다. 이러한 답변을 통하여 주님은 이전에 그 어떤 랍비도 능히 하지 못했던 일을 이루셨다. 즉 성경으로부터 사두개인들의 신학의 허구를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며, 지상에서 생각할 수 없는 방식의 새로운 삶이 죽음 이후에 존재할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주님의 답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실제로 주님은 이승이건 저승이건 모든 삶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그렇지 못한 것은 결코 삶 혹은 생명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는 교훈이다. 그렇다면 주님과의 바른 교제가 시행되는 삶은 시간과 무관하게 곧 천국적 삶(heavenly life)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고 두 분 사이의 그러한 우정은 결코 죽음으로 나눠질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은 육체적 실존의 끝이지, 본질적으로 영원성을 띠고 있는 관계의 끝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음으로 친구를 잃을 수는 있을 것이나, 하나님을 잃을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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