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76강) 교회와 국가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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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76강) 교회와 국가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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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5.2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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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사에 대한 세금 논쟁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세속왕국에 순종하면서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충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르쳐주셨다.

유대 지도자들과의 세 번째 논쟁의 제목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문제였다(막 12:13~17; 첫 번째 논쟁은 예수님의 권위[막 11:27-33], 두 번째 논쟁은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 [막 12:1~12]). 이들 세 이야기는 공관복음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주님 당시에 로마제국은 식민지 국가에 모두 세 종류의 세금을 부과하였다. 먼저는 토지세인데, 곡식 수확의 1/10과 기름과 포도주 수확의 1/5을 납부하도록 되었다. 이 세금은 일부는 현물로 또 일부는 돈으로 납부할 수 있었다. 다음은 소득세인데, 개인 소득의 1%를 바치도록 되어있었다. 그리고 인두세인데, 14세부터 65세까지의 남자와 12세부터 65세까지의 여자에게 부여되었는데, 한 데나리온이었다.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이를 ‘셋돈’이라 정확하게 표현하였는데(마 22:19), 반면에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그저 데나리온이라고 기록되었다(막 12:15; 눅 20:24).

이처럼 마태가 세금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를 사용한 것은 과거에 그가 세리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며, 이것은 더 나아가서 제1복음서의 저자가 세리 마태임을 가리키는 한 증거일 수 있는 것이다(마 9:9).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였다(마 20:9).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첫 번째 논쟁처럼, 양날 가진 칼 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이번의 문제는 인두세(poll-tax)였다. 이 문제에 대한 부정적인 답변은 바로 제국에 대한 반역죄로 간주될 것이고, 반대로 긍정적인 답변을 하게 된다면 추종자들이 떠나버릴 것이었다.

특별히 이 세금은 유대인들이 민족적 굴욕의 표시로서 간주하여 몹시 증오했던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 은전의 표면에 왕관을 쓴 황제의 얼굴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는 형상(image)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후대에 로마는 팔레스타인에서 활용되는 동전에는 황제의 형상이 들어가지 않도록 배려하였다고 한다.

은전(silver) 데나리온을 보여 달라고 요구함으로써 주님은 대적들의 간계를 들추어보였다. 만일 그들이 로마 동전과 함께 로마가 베푼 경제적 안정과 정치적 질서의 혜택을 받아들인다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에 대답을 제시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단지 그들과의 논쟁에서 이기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이 제시하신 답,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막 12:17)란 말씀은 장차 교회와 국가 사이에 야기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의 기초가 될 만한 원리를 매우 웅변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참고, 롬 13:1-7; 벧전 2:13~17).

물론 주님의 답변이 성(聖)과 속(俗)이 두 개의 독립적이고 관계없는 삶의 영역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그 역사적 실존의 속성상 하늘과 땅의 두 왕국에 속하여 있으며, 양쪽 왕국 모두에 충성의 빚을 지고 있되, 한쪽은 조건적인, 다른 한 쪽은 절대적인 빚을 지고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을 다루시되, 부분적으로 사회와 정부의 비인격적이고 오류가 많은 제도를 통하여, 또 부분적으로 주님 자신의 주권적 사랑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영향력을 통하여 다루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로마 황제 가이사(주님 당시에는 디베료, 마가 당시에는 네로)가 인간들의 삶에 질서를 제공함으로써 하나님이 맡기신 기능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그는 세금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 것이다. 이 경우 세금은 정복자가 피지배 국민에게 강제로 강요하는 짐이 아니라, 도덕적 의무로써 인정될 수 있는 빚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이사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을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곧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이다. 반대로 종교가 국가의 기능을 흡수하려고 시도한다면 역시 동일한 결과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은 가이사에 대한 충성을 하나님께 대한 불충성으로 간주하여 무력으로 저항했던 열심당(the Zealot) 운동을 지지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애초에 주님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청중에게 이 말씀을 하였을 때는 정치와 종교의 양립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처럼 슬기로운 답변을 통하여 주님은 대적들의 말꼬리를 무는 함정을 단지 피했던 것만이 아니라, 유대 민족주의 운동과의 모든 연계를 단절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세속 왕국에 순종하면서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충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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