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서(104강) 유다왕국 내 민간신앙 금지 및 야웨 종교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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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서(104강) 유다왕국 내 민간신앙 금지 및 야웨 종교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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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5.1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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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아시리아 연대기를 재구성하면 요시야 종교개혁과 아시라의
국내정세 변화와 연관지어 생각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열왕기하 22장 3절 이하에서는 요시야 종교개혁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요시야 왕 통치 제18년에 요시야 왕은 서기관 사반을 성전으로 보내 성전문을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산하여 여호와 성전을 맡은 감독관에게 주고 성전 가운데 부서진 것을 수리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결과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다고 말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읽어 주었다. 즉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서기관 사반은 성전 보수공사에 대하여 왕에게 보고하고(9절), 사반은 힐기야 제사장이 읽어주었던 율법책을 왕에게 읽어주었다(10절). 책의 내용을 들은 왕은 옷을 찢었다.

따라서 요시야는 대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 그리고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율법책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고 명령한다(12~13). 이에 이들은 여선지자 훌다에게 물으니 그녀는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하지 않으면 여호와가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여 여호와의 분노를 일으켰기 때문에 여호와의 진노가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17절). 그러나 이스라엘이 듣고 옷을 찢으며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내리겠다고 말했던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말하였고, 그 내용을 그대로 요시야에게 보고하였다.

열왕기하 22장은 요시아 왕 때 어떻게 종교개혁이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요시야 종교개혁은 구약성서에서 가장 많은 논의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계속 논의되고 있다. 특히 요시야 종교 개혁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아시리아 제국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것은 앗수르바니팔 이후의 아시리아 왕들의 연대기를 인위적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즉, 요시야 제8년은 앗수르바니팔의 통치와 관련이 있고, 그의 통치 제12년에 해당하는 주전 628년은 앗수르-아필-일라니(주전 633~629년)의 통치와 관련 있고, 제18년인 주전 622~1년은 신샤르-이쉬-쿤(주전 629~612년)의 통치와 관계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자료들을 중심으로 아시리아의 연대기를 재구성하면 요시야 종교개혁과 아시리아의 국내정세의 변화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요시야 왕의 개혁과 아시리아 제국과의 관련성은 다음 네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연대기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연대계산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대를 가지고 확실한 주장을 할 수 없다. 둘째, 아시리아가 내부적인 문제로 팔레스틴에 대한 지배를 약화하자 요시야 왕이 아시리아 제국이 통치하던 사마리아 속주의 일부, 혹은 전부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하였다는 것이다. 앗수르바니팔은 651, 645년에 남쪽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사막의 아랍인들을 상대로 한 정벌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644~609년까지는 그의 업적에 대하여 공백으로 남아 있다. 주전 645년의 정벌이 이미 일어난 반란에 대한 징벌이었다면, 반란은 이보다는 먼저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아시리아가 바벨론과의 분쟁으로 정신없었을 때를 이용한 반란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은 주전 609년 시리아 팔레스틴 지역이 완전히 이집트의 지배 아래로 넘어갈 때까지 지속되었다.

셋째,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이 반아시리아적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아시리아가 속국들에게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였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아시리아의 종교정책에 의하면 속주에서는 자신의 종교를 강요할지라도, 봉신국가에서는 그 나라의 종교가 아무런 방해 없이 지속되었다. 마지막으로 요시야의 우상숭배 금지가 아시리아 종교와 관계가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그에 의해서 제하여진 우상들은 남쪽 시리아 지방에서 고래로 믿어오던 지방의 신들이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유다왕국 내에서 지방의 민간신앙을 금지하고, 중앙집권적인 야웨 종교를 확립하려는 시도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의 행동은 아시리아 제국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그의 개혁이 반아시리아적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최근 발견된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에 의하면 요시야 왕은 종교적 전통을 철저하게 지켰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발견된 모사이에프(Moussaieff)의 오스트라콘은 요시야가 딸을 낳고 그 딸을 위하여 서원 값 3세겔을 성전에 납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서원의 값을 지불함에 있어서 왕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요시야가 종교 개혁을 주도하는 입장에서 종교적인 전통을 철저히 준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철저하게 율법의 규정을 지키게 된 것은 아마도 요시야 시대에 발견된 율법책의 영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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