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74강)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자들이 당하는 봉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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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74강)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자들이 당하는 봉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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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5.1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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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

교묘한 질문으로 주님을 함정에 빠트려 백성의 지지를 철회시키려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시도는 다시금 실패하고 말았다.

무리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성전을 정화함으로써 탁월한 도덕적 용기와 권위를 보여주신 주님은 이제 날마다 그 성전에서 활보하며 다니시자, 유대의 종교지도자들, 즉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더 이상 주님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막 11:27~33).

주님에 대한 인기가 그러하자 자신들의 위치에 위협을 느낀 그들은 주님의 존재를 간과할 수도 없고 또한 그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도 없는 매우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주님을 지지할 수는 더욱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을 함정에 빠뜨려, 로마 정부에 대항하는 범법자로 만들거나 아니면 백성들의 지지를 차단하도록 만드는 발언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막 11:28). 주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에 대답함에 있어서, 만일 주님이 메시야임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서야 할 내란(內亂) 죄가 될 것이고, 반대로 부인한다면 백성들의 지지를 잃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교묘한 질문에 대하여 주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질문에 답하도록 만듦으로서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29-30절).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든지 간에 그들은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이었다.

만일 그들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함으로써 유대의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하여 공식적인 견해를 갖고 있지 않음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산헤드린 공회로써는 지극히 난처한 일이 되고 말았을 터인데, 왜냐하면 세례 요한에 대하여 나름대로 입장을 정리하지도 못한 처지에 예수님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할 계제가 못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다른 교회 관료들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그들은 공적인 통로를 통하여 허락을 받은 사람만이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점이다(참고, 행 4:7).

여기서 주님이 세례 요한에 관한 질문을 던진 것은 예수님의 등장과 선포를 합법화하시는 분이 다름 아닌 세례 요한의 등장과 선포를 합법화하신 바로 그 분, 즉 하나님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질문의 포인트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듯이(막 1:4~5; cf. 눅 3:7; 마 3:7), 주님의 사역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용의가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교묘한 질문으로 주님을 함정에 빠트려 백성의 지지를 철회시키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시도는 다시금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때 기억해야 할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막 13:11). 이 주님의 예언이 실현된 한 증거로써 우리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사역을 볼 수 있다(행 4:1~22). 50일 전 스승 예수님을 죽게 만든 유대 관헌 앞에서 “학문 없는 범인”인 그들이 그렇게 담대하였던 것은 결국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도우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는 삼중전승(triple tradition)으로써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막 12:1~12; 마 21:33-46; 눅 20:9~18). 먼저 예수님이 애초에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청중들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는 다분히 이방인의 구원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비유가 언급되어진 당대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팔레스타인과 같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에서 많은 토지 및 부동산은 외국인들이 소유하였고, 그것을 소작농들이 임대받아 경작하였다.

그런데 소작농들은 나라의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불황으로 인하여 종종 부재지주에게 지불해야 할 소출(일종의 월세, rent)을 내지 않곤 하였다. 이럴 경우 종종 폭력이 행사될 수도 있었고, 끝내 그것은 살인으로 이어지곤 하였다. 그런 과정 중 만일 토지의 상속자가 죽게 된다면 그것은 ‘임자 없는 토지’로 선언되었고, 그 경우 실제 그 땅의 사용자가 소유권을 갖게 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당대 유대나라의 일상적 경험으로부터 이 비유를 소개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유대인들의 잘못 된 태도를 설명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들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표상하는 포도원이 등장하는 이사야의 포도원 비유를 떠올리게 되었을 것이다(사 5:1~7). 그러므로 유대 관헌들은 불가피하게 주님이 이 비유를 자기들을 염두에 두고 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막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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