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73강) 겉모습은 화려하나 본질을 잃어버린 삶에 대한 경고
상태바
마가복음(73강) 겉모습은 화려하나 본질을 잃어버린 삶에 대한 경고
  • 운영자
  • 승인 2012.05.03 10: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전 정화 사건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어쩌면 우리도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와 성전처럼 준엄한 심판을 받을수도 있다.

주님이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처음 행하신 일은 바로 성전을 청결케 하는 사건이다(막 11:15~19; 마 21:12~17; 눅 19:45~48). 이것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주님이 첫 번째 행한 일이라는 사실은 이 사건이 갖는 의미가 각별함을 뜻한다. 그러면 주님이 성전에 들어가서 상행위하는 자들을 모두 내어 쫓은 그 행동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성전 정화사건>이 주님이 예루살렘 입성 후 착수한 첫 번째 일이란 사실과 이 사건이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것은 이 사건이 주님의 정체성, 즉 주님이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주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었다(요 2:13~17).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는 이사야 56:7의 말씀의 인용을 통하여 주님은 메시야 의식을 밝히 드러내신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일이 곧 참 성전이신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하나의 과정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참고, 요 2:21). 그러나 주님의 의분(義憤)으로 한 번 깨끗하게 된 성전은 또다시 더렵혀질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주님은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셨던 것이다(마 24:2; 23:38). 그리고 그 후에는 더 이상 보이는 성전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참 성전이신 주님을 믿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예루살렘 입성 후 다음 날, 주님은 베다니에서 머무신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막 11:12 이하). 마태와 누가복음에서는 주님이 예루살렘 입성 후 바로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정화시키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마 21:10~17; 눅 19:45~46), 마가복음에서는 그보다 앞서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 이야기(막 11:12~14, 20~21)를 소개함으로써, 성전 정화사건을 보다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마가복음에 자주 반복되는 샌드위치(sandwich) 구조의 전형적인 예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무화과나무 이야기 사이에 성전 정화사건이 삽입되어 있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없으나, 마태복음에는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성전 정화사건 다음에 등장함으로써, 마가복음처럼 샌드위치 구조를 띠고 있지는 않다. 과연 마가는 이러한 대조적 구조를 통하여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먼저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에 대해 살펴보자. 겉으로 보기에 잎이 무성하여 당연히 열매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던 나무에 열매가 없자, 주님은 그 나무가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를 선언하셨다(막 11:14). 마태복음에서는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가 즉시 시들어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마 21:19), 그 이유를 묻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믿음을 격려하는 설교의 말씀을 주시었다(마 21:20~22).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그 나무가 즉시 시들지 않았고, 바로 이어서 성전 정화사건이 등장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다가 무화과나무가 시든 것을 베드로가 보고 지적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다음으로 성전 정화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성전 정화사건>은 당시 성전이 제사로써 백성들의 죄를 사하여 주는 본래의 임무를 망각한 채 부패하고 타락하였기에 발생한 것이었다. 사실 유대 관헌이 성전에 시장을 허락한 것은 예배자들이 매년 반 세겔을 내야하는 성전세를 납부하기 위해 환전소가 필요한 까닭에(마 17:24~27), 그리고 흠 없는 희생제물을 살 수 있도록(레 1:3)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외부에서의 동물 반입을 차단하고 성전 내의 동물의 값을 터무니없이 높임으로써 제사장 귀족들이 자신들의 물욕(物慾)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기에 주님의 분노를 격발시켰던 것이다. 당시에 유대 관헌에 의해 합법적으로 세워진 기존의 질서에 주님이 이처럼 도전한 것은, 첫째는 성전 제사의 본래의 목적을 훼손하는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이었고, 둘째는 시장이 이방인의 뜰에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이방의 빛”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이 그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기준에서 볼 때 매우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이러한 주님의 행동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한다. 은연 중 우리는 오늘 우리의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상업주의적 행태에 익숙한 나머지 세상과 차별화되어야 할 모습이 점차 사라져버리고 있음을 잊고 사는 듯하다. 아울러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서의 선교적 사명 보다 현실 안주 및 타협의 안이한 선택을 통하여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참고, 마 5:15~16).

무화과나무의 저주 사건과 성전 정화 사건을 연계하여 기록함으로써 마가는, 겉모양을 화려하나 상행위로 말미암아 본연의 임무를 상실해 버린 성전이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마침내 멸망당할 것을 예언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 된다. 만일 우리가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어쩌면 우리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성전처럼,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유지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