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축복권으로 신앙 물려주는 아버지 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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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축복권으로 신앙 물려주는 아버지 되고파”
  • 이덕형 기자
  • 승인 2012.04.12 1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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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의 상처 신앙으로 극복한 경민대학교 호텔관광경영학 장 상 태 교수

세상의 길이 막힐 때 신앙의 길 열려
아버지의 눈물은 가족회복의 지름길

세상에는 말이나 글로 표현되지 않는 단어들이 있다. 가난이란 단어가 그 중 하나다.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단어. 세월의 칼끝이 매순간 기억을 깎아 내리며 아픔을 세기기 때문에 가난은 머리와 함께 몸이 기억하는 지울 수 없는 상처다.

그래서 가난이 싫었다. 함께 찾아온 고통과 외로움, 남몰래 매일 삼켜야 하는 서러움이 아팠다. 그렇게 서러움은 말하기 조차 싫었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두 번 다시 자식에게는 대물림해주기 싫었다.

“가난이요. 말해도 알 수 없고, 듣는다고 이해할 수 없는 문제죠. 그 문제를 내려놓을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었습니다. 주님을 모를 때부터 지금까지 제 고통과 아픔, 슬픔을 알아주신 유일하신 하나님, 이제 신앙은 나의 모든 것,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워커힐호텔 웨이터에서 기독교대학 경민대학교 호텔관광경영학과 학과장이 되기까지 질곡 깊은 삶을 살아온 장상태 교수를 만났다.

# 가난의 상처
창문 넘어 4월의 청량한 하늘 아래 뿌연 황사먼지가 가득한 교정을 뒤로하고 들어선 경민대 호텔경영학과 교수실, 밝은 미소의 장 교수를 만났다. 하지만 거슬러 올라간 기억에서 그가 떠올린 어린 시절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가난과 아픔 두 단어뿐이었다.

“어린 시절이요. 금전적으로 부족했던 기억이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네요.”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장 교수는 경북 문경이 고향이다. 2백평도 안 되는 논마지기는 고아처럼 살아온 아버지가 세상과 싸워 일궈놓은 재산의 전부였다. 그래서 집안에는 가난이 늘 떠나지 않았다. 학교 준비물을 마련해가지 못한 일상, 중ㆍ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이 떠난 빈 교실에 남아 졸업여행을 가본적이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점은 돈이 없어 제대로 치료 한 번 받지 못해 아파하고 힘들어하던 어머니를 지켜보는 일이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던 어린 시절, 가난은 지독한 아픔으로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돈이 없어 갈 수 없는 대학. 그 때 할 수 있는 최선은 입이라도 하나 줄이자는 심정으로 독도수비대를 택하는 일이었다. 제대 후에도 가난은 그대로였다. 그런 20대 초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던 맏아들의 손에 어머니는 돈 10만 원을 쥐어줬다.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제 모습에 어머니도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집에서 벗어나 스스로 가난을 극복하라는 의미로 10여 만원 되는 돈을 쥐어주셨습니다. 그나마도 옆집에서 어렵게 빌린 돈이었습니다.”

1980년 봄, 서울로 올라와 첫 번째 구한 직장은 워커힐호텔 실습생으로 웨이터로 취직했다. 직장으로 출근하던 첫날은 교통비가 없어 바람부는 천호대교를 걸어서 건넜다. 아무것도 없이 혼자만 있는 외로운 상황. 당시엔 신앙도 없어 의지할 대상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와서도 이해 안 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 때까지 교회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제가, 첫 월급으로 성경책을 산 일이었습니다.”

첫 월급은 4만 원. 머리에는 온통 내 인생에서 의미 있는 소중한 일을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돈을 손에 쥐고 찾은 곳은 기독교서점. 4만 원 월급에서 8천 원을 주고 서점 내에서 가장 비싼 성경을 샀다. 그 뒤로 교회에 나가기까지 13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때 산 성경은 후손에게 전해주기 위해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 신앙의 길이 열리다
식당웨이터로 일한지 5년만에 캡틴으로 승진했다. 그렇게 중간지배인이 된지 3년이 더 흐른 후에는 르네상스호텔 오픈식에 지배인으로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1980년 웨이터였던 빈손의 청년은 8년이 지나 한 호텔의 지배인이 될 수 있었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말단 생활에서부터 배움에 대한 소망이 강해 새벽 6시부터 영어, 일어 학원에 다니며 부지런히 회화를 배우기도 했죠. 노력이었고 결실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과 어려운 환경을 대물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심이 원동력이었다. 8년 동안 어려움도 있었지만 모든 것이 하나씩 풀려나갔다. 남모른 노력이 쌓이는 만큼 마음먹고 목표하는 길도 하나씩 열렸다. 1984년 평생의 배필을 만난 일도, 사랑하는 두 자녀가 태어났던 일도 쓰디쓴 세상살이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됐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 때부터 1989년까지 가난과 물질의 한을 풀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너무나 간절히 원했던 바람, 물질의 복은 기회로 밀물처럼 잠시 찾아왔지만 썰물처럼 순식간에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마음에는 또 다른 분노와 상처만 남긴 채. 믿었던 사람도, 재물도 눈 앞까지 다가왔다가 새벽안개처럼 사라졌다.

“당시 제 속에는 분노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분노, 원망. 그 때 아내가 교회에 한 번 나가보라고 권하더군요. 나중에 보니 아내는 이전부터 교회 권사님, 집사님과 함께 제가 교회 나올 수 있도록 오랜 시간 중보기도를 해왔더군요. 그 때 아내가 저를 살렸습니다.”

끊어질듯 약하게 시작된 신앙생활은 장안동 동촌교회에서 문정동 개척교회로 그리고 다시 산본 신도시로 이어지다 1993년 박종식 목사가 시무하던 평촌 새중앙교회에서 굳건해지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귀에 들어오지 않던 말씀이 한 번의 예배로 인해 바뀌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소나기가 내린 후 청량한 하늘, 맑게 게인 하늘처럼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늘도, 사람도, 나무도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그 동안 감고 있던 나머지 한쪽 눈을 뜨게 됐습니다.”

막혔던 세상의 길은 신앙의 길로 다시 열렸다. 33세의 나이로 경희대 호텔관광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비록 입학할 때 점수는 낮았지만 1학년 1학기 3등 한 것을 제외하면 4년 내내 수석 자리를 양보해본 적이 없을 만큼 열심히 지낸 시기였다. 이후 세종대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석사학위 3학기 때는 경민대학교 정교수로 임용됐다.

# 기억의 상처 끊어 내기
“뜬금없는 얘기지만 맞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든 적 있습니까? 이 질문에 실소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께 심하게 맞은 그런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잘 아물지도 않고요.”

항상 병환으로 고생하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젊어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장 교수의 아버지는 고아 아닌 고아로 자랐다. 외가에서 10년간 일해서 얻은 2백평 땅이 전부였던 아버지는 배움의 기회가 없어 엄격함만이 자신과 자식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이라 굳게 믿고 살아왔다. 그런 아버지는 장 교수에게 마음속으로 가까이하기 힘든 대상이었다.

그러던 중 1998년 두 번째로 인생이 변화되는 기회가 찾아왔다. 과거의 나, 잃어버린 나와 다시 만날 기회를 찾았다. 장 교수의 인생을 송두리째 회복시킨 계기는 두란노 아버지학교에서 찾아왔다. 신앙의 회복에 이어 가정의 치유가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학교를 마친 후 정말 받고 싶었던 게 뭔 줄 아세요? 아버지의 축복기도였습니다. 민수기 6장 24절에서 26절을 종이에 써서 아버지께 건네 드린 날 아버지는 그 말씀에 제 이름을 넣어 축복기도를 해주셨습니다.”

돌아온 명절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형제들과 손주들과 장 교수 자신에 이르기까지 얼싸안고 축복기도를 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그 날 강철같이 차가운 인생을 살아온 장 교수의 아버지는 눈물로 마음을 열어 보였다.

“아버지가 말씀하시더 군요. ‘부모님으로부터 교육도 사랑 한 번 받지 못한 아비다보니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거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대물림해주는 게 무서워 엄하게 매로 키웠다. 미안하다’며 안아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통로가 드디어 열렸다고 말하는 장 교수는 이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시겠구나하는 느낌과 ‘상처의 대물림’을 여기서 끊어 낼 수 있다는 생각에 감사기도를 올렸다는 기억을 전했다.

# 여보, 사랑합니다
“아버지학교를 다니며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말, 그건 가족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제 아내에게요.”

마지막 날까지 아무런 감동도 없었다. 강단에서 수료간증문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냉랭한 느낌뿐이었다. 하지만 수료간증문을 읽기 시작하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읽는 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자라서 울 수 없었던, 가장이어서 참고 있었던, 아버지라서 잊고 지냈던 외롭고 차갑던 인생에 따뜻한 눈물샘이 터졌다. 단상 위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 앞에서 터져 나온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장 교수는 기억의 상처가 회복되는 치유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 순간의 눈물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인생의 치료제, 아픈 기억에 대한 치료제였다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독선적이었던 나. 나도 모르는 언어의 폭력에 아내는 많이 힘들었겠구나하는 생각에 많이도 울었습니다.”

4남매가 서울 자신의 집을 거처 간 점, 대학시절 부모님 대신 뒷바라지 해줬던 일 그리고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질주해온 그를 뒷받침해준 시간 모두가 고마움으로 다가왔다. 어린 시절 어려웠던 환경이 삶 속에 녹아 아내와 자식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줬던 점이 아픔으로 다가왔다고 말하는 그는 하나님께서 삶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주셨다고 고백했다.

이제는 아내와 같은 운동, 같은 취미를 갖고 있다. 카카오톡으로 가족 간에 대화도 하고 항상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지갑 안쪽에는 아내 사진과 자식과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이 함께 들어있다. 올 초여름에는 아는 교인 세 가정과 부부동반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비록 풍족 하지 않아도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함이다. 

▲ 장상태 교수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으로 ‘성경’을 선택했다. 말씀만큼 좋은 유산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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