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은 ‘희생과 양보’로 가능... 이익은 “하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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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은 ‘희생과 양보’로 가능... 이익은 “하나님께”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2.03.16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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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한국 교회 다시 세우자 (4)- 갈라지는 ‘연합’ 이대로 좋은가(하)

찬송가공회 이중계약과 법인 설립 파문은 ‘2개의 찬송가’ 태동시켜
한국 교회 연합과 일치, ‘내용과 지역’ 중심으로 새롭게 일어나야

연합운동이 권력화 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면 연합사업은 막대한 이권을 둘러싼 내분으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국 교회가 만든 연합사업기관은 대한기독교서회, 찬송가공회와 CBS, CTS기독교TV 등이다. 영국 성서공회가 1800년도 말에 한국지부 설립을 결의하면서 1941년 조선성서공회가 설립됐지만 자생적으로 생겨난 연합사업기관은 1890년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셩교서회’가 처음이다. 당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은 복음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문서선교’였다. 당시 서회는 쪽복음, 전도문서, 한글성경, 찬송가 등을 보급하며 민중 계몽에 앞장섰다.

서회의 여러 역사적 기여 중 찬송가의 통합은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장로교의 ‘찬양가’와 감리교의 ‘찬미가’를 합해 1908년 ‘합동 찬숑가’를 출판한 것.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1983년 통일찬송가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한다. 다같이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는 것. 이것은 한국 교회가 그동안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 연합의 결과였다.

# 아름다운 연합 ‘찬송가’

연합운동 기관 중 보수를 대변하던 한기총이 두 개로 분열을 예고하고 있다면, 연합사업에서 처음으로 분열이 야기된 곳이 바로 ‘찬송가공회’다. 찬송가공회는 합동찬송가를 사용하던 개편찬송가위원회와 새찬송가를 사용하던 새찬송가위원회가 하나의 찬송가를 만들자는 합의하에 연합, 결성한 단체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하나의 찬송가’가 간절했던 이유는 1970년에 이어진 대형집회 때문이었다. 부활절연합예배와 엑스플로성회 등 연합집회에서 회중들은 각기 다른 찬송가에서 하나의 곡을 찾아내 불러야 했다. “새찬송가 몇 장, 개편찬송가 몇 장입니다”라는 사회자의 멘트는 50대 이상에게는 익숙한 기억이다.

더 이상 두 개의 찬송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은 하나의 찬송가를 위한 열망으로 이어졌고, 새찬송가위원회와 개편찬송가위원회가 ‘찬송가공회’를 결성하면서 1983년 ‘통일찬송가’를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교계는 “공교회의 기념적 산물”이라며 하나의 찬송가 출간을 기뻐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전통은 30년도 채 이어지지 못했다. 빠르면 올 4월 새로운 찬송가 탄생이 예고됐기 때문이다.

# 찬송가 왜 분열됐나?

통일찬송가 출간 이후 찬송가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졌다. 연합사업은 ‘상업적 결과물’을 내놓음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거두기 시작했다. 물론 이 이익은 선교에 재사용된다는 전제를 깔았다.

찬송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찬송가공회는 소속 교단에 선교비로 지원하는 것과 통일찬송가로 기존의 찬송가를 무상 교체해주는 등 기본적인 발행원칙을 세워 놓았다. 처음 찬송가 출판은 개편찬송가 출판권을 가지고 있던 대한기독교서회와 새찬송가를 출판하던 생명의말씀사가 맡았다. 그러나 찬송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출판계에 나돌기 시작하면서 1985년부터 ‘불법 사제 찬송가’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공회는 이런 사제 찬송가에 강력 대응을 천명했고, 법적 고소까지 검토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이 수그러들기 시작한 것은 1991년. 공회임원들은 서회와 말씀사의 출판구조를 깨고 비밀리에 해설찬송가 발행권을 일반출판사에게 풀어 주었다. 이후 20년 넘게 찬송가공회와 기독교서회는 ‘이중계약’ 문제로 시비가 일었으며, 지난 2008년 찬송가공회는 “경쟁력 유도”라는 명분을 앞세워 ‘재단법인’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중계약 후 공회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인세의 증가. 무려 10배가 넘는 돈이 들어왔다. 탐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 일반출판사들에게 출판권을 개방하는 법적 당위성을 확보하는 것도 재단법인 설립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공회는 21세기찬송가 발행 직후인 2006년 서회 및 예장출판사와 독점 계약을 체결했고, 1년 뒤부터 이중계약으로 일반출판사들에게 출판권을 준 것이 문제가 되어 지난 2월 검찰로부터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구형받았다.

출판권을 둘러싼 재단법인과 출판 연합기관의 갈등은 사회법에 시비를 가리게 됐고, 재단법인의 불법성에 항의한 교단들은 비법인 찬송가공회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찬송가 발간을 천명했다. 출판권을 둘러싼 20년 넘는 갈등과 재단법인 설립으로 시작된 교단 간 분열이 결국 찬송가를 가르는 계기가 된 것이다.

# 이권, 그 막대한 유혹

찬송가의 분열 배경에는 ‘이권’이 있다. 찬송가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연합정신을 흔들고, 교단 사이를 이간시켰다. 찬송가를 ‘돈’으로 판단한 공회는 저작권 관리를 전문회사에 위임하며 막대한 이득을 취하려 했지만, 결국 이는 자기 족쇄가 되어 찬송가 저작자들에게 엄청난 저작권료를 물어줘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권의 유혹은 이처럼 연합기관은 분열시키기도 하지만 연합기관을 사유화하게 만들기도 한다. 서회나 성서공회 등 문서출판에 의존한 연합사업 기관들은 각 교단에서 이사를 파송하는 형태를 띤다. CBS나 CTS도 마찬가지다. CBS와 교회협, 서회 등은 사장과 총무를 4개 교단이 돌아가면서 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협을 중심으로 관련을 맺는 기관들은 통합, 감리교, 기장이 돌아가면서 사장과 총무를 배출해왔다. 그러나 이런 전통은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깨지고 말았다.

이사 수가 많은 성서공회와 CTS 같은 연합기관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 두 기관은 특징은 연합사업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성장하고 있지만 최대 주주 혹은 경영진이 ‘사유화’의 기반을 확장한다는데 있다. 성서공회의 경우, 경영진의 지지를 돈독히 할 수 있는 ‘찬성회원’제도를 두어 이사회의 절대권한을 감소시켰으며, CTS는 최근 이사회를 통해 경영주 추천 이사에 이어 회장 추천 이사제도를 신설했다. 그동안 교단 파송 이사로만 구성된 연합기관이 경영자 파송 이사로 확대되면서 연합의 힘이 약화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주인’ 없이 방치된 연합기관이 몰락하는 것보다, 능력있는 경영주를 중심으로 구조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만 연합기관 본래의 목적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유화’구조를 철폐하고 교단의 관리감독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연합의 본래 목적은 ‘선교’

안타까운 것은 한국 교회가 연합의 본래 목적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단이 모여 하나의 산물을 위해 기도하고, 논의하고, 그것을 팔아 생긴 이익으로 선교하는 역사는 이제 좀처럼 보기 어렵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수익이 날 때 다양한 형태의 선교를 하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사유 구조를 강화하고 흑자를 줄여 경영주 혹은 임원진의 이익으로 돌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문제는 한국 교회가 복음에서 멀어지고, 세상적인 권력과 이익을 좇아가면서 ‘연합’의 균열은 심화되고 있다는 것. 신자유주의 경쟁 논리는 이미 교회 깊숙이 들어와 있고, 이익을 내지 못하는 연합기관은 무능하다고 치부한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편법과 불법을 저질러도 묵인한다.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쓰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더 많이 벌었다고 해서 선교적 결실이 풍성해졌다는 소식은 들은 바 없다.

연합운동이 권력과 탐욕에 의해 분열되고, 이념과 정치적 결탁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면 성경과 찬송, 방송 등 문화사역을 기반으로 한 연합사업 역시 ‘이익’에 눈멀어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

한 연합기관 관계자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를 모색해야 하지만 그것이 연합정신에 벗어나는 결과를 초래하진 않을지 고민”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총신대 박용규 교수는 “연합과 일치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사명이지만 쉽지 않은 과업”이라며 그 이유로 “많은 희생과 양보와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희생과 양보가 없이는 연합도 없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 연합을 위한 기본원칙에는 공동선교와 협력이 명시되어 있다. 새로운 연합기구가 탄생하지는 못했지만 그 목적에 분명히 “복음선교와 사회봉사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교단을 초월해 서로 협력하자”는 내용이 남아 있다. 선교와 봉사를 넘어선 연합은 불필요 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돈과 권력을 위한 연합은 ‘결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대한 연합이 깨지고 있다면 작은 연합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도 대안 중 하나다. 성서한국 구교형 목사는 “상시적 연합기구들이 이권과 탐욕으로 타락하는 일이 불보듯한 상황에서 큰 기구 중심의 연합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며 “지역중심, 내용 중심의 연합으로 새롭게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박용규 교수는 “루퍼트 멜데니우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며 “한국 교회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문제에는 일치를, 지엽적인 문제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일에는 사랑을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점점 균열이 커지는 ‘연합’의 원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교’라는 목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세상에 힘을 과시하기 위한 거대한 조직의 연합체라면 필요하지 않다.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두 개의 찬송가, 두 개의 한기총을 만든다면 그 역시 교계나 사회적 지지를 얻기 어렵다.

공동의 목적을 세우고 이를 위해 교회가 서로서로 양보와 희생의 약속을 하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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