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갖힌 자’에게 관심 가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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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갖힌 자’에게 관심 가질 때”
  • 김동근 기자
  • 승인 2012.03.14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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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소자들의 아버지’ 홍성교도소교회 김봉래 목사

며칠 전 김봉래 목사(홍성교도소교회)에게 모르는 번호로 문자메시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목사님, 잘 지내시죠? 어디에 계십니까?”

누구냐는 김 목사의 물음에 “저는 목사님을 잘 압니다. 오래전 커피도 한 잔 얻어먹었고요”라고 말하는 그. 과거 교도소 내에서는 커피조차 마시지 못했다. 김 목사는 당시 커피를 얻어 마신 사람이라면 ‘문제수용자’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고민의 고민을 거듭해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고, 메시지의 주인공이 산다는 여주에 도착해서야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여주에서 만난 김모 씨는 김 목사가 교도관 시절 그를 못살게 굴며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했던 ‘문제수용자’였다. 그는 출소 후 아내를 만나 사업을 일궈 지금은 한 사업체의 어엿한 사장이 되어있었다. 물론 김 목사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도 영접했다.

“잘 살아줘서 고맙다.”

김 목사의 한 마디에 수줍은 웃음을 보였다는 김 씨. 이렇게 출소 후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살아가는 옛 인연들을 만날 때 김 목사는 가장 행복하다.

#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김 목사의 교정선교는 제주도에서 시작됐다. 교도관으로서 첫 부임지였던 제주교도소에 있을 때 김 목사는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다. 삶의 목적이 뚜렷하지 않았기에 두 번이나 자살시도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묘한 이끌림에 찾았던 교회에서 김 목사는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고백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주께서 저를 부르셨으니 오직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 교도소에서 맺어진 사랑
김 목사의 30여 년의 교도관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사람이 있다.
1986년에는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이 있었다. 당시 조직의 막내 역할을 했던 김모 씨도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그 곳에서 김 목사를 만났다.

사형을 구형받고 두려움에 떨며 눈물로 지내던 어느 날, “살고 싶다면 예수를 믿어보라”는 김 목사의 권유에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그의 도움으로 하용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아 믿음의 사람이 됐다. 그리고 얼마안가 사건에서 주모자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법원의 판단으로 그의 형량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죽음은 김모 씨를 빗겨갔다. 김봉래 목사는 “정말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기뻐했고, 시간이 지나 김 씨는 모범수가 됐다. 그런 그에게 김 목사는 믿음의 자매를 소개했다. 편지와 면회로 둘은 사랑을 키워갔고, 비록 옥중에서였지만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 결혼했다.

교도소 내의 ‘만남의 집’에서 예쁜 딸도 얻었다. 김 목사는 “아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며 “어서 이 가족이 함께 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기대의 말을 전했다.

# 담대함으로 이겨낸 위기
마음이 좋고 착한 교도관들이 있으면 그들을 이용하려는 재소자들이 있다. 교도관 시절 교정선교를 하면서 김 목사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에 대해 김 목사는 ‘형광펜 20다스 사건’을 꼽았다.

김 목사는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위해 휴가를 다녀왔는데, 책상에 18다스의 형광펜이 있었다. 김 목사가 담당하고 있던 재소자에게 온 소포의 일부였다. 2다스의 형광펜은 일을 도와주던 새내기 교도관이 이미 재소자에게 전달한 상황이었다. 형광펜을 빼 줄을 그어보니 잉크가 말라 써지지 않았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김 목사가 형광펜의 속을 봤을 때 그 안에는 담배로 가득 차있었다. 교도소에서 담배는 금지품목이다. 덜컥 겁이 난 김 목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보고를 하려던 찰나 문제의 재소자가 김 목사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하얀 가루를 건네며 형광펜 속에 마약이 있었다고 말하는 재소자.

두려웠지만 담대하게 그 소포를 보낸 사람을 추적해 고발하겠다고 담대하게 응수하자 그 재소자는 당황하며 잘못했다고 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하얀 가루의 정체는 밀가루였다고 실토했다.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물론 새내기 교관도 징계를 면치 못할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 ‘홍성교도소교회’
전국 어디에 가도 교도소 안에 교회의 건물이 독자적으로 있는 곳은 없다. 김 목사의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홍성교도소에는 ‘홍성교도소경비교도대교회’가 들어섰다. 하지만 얼마못가 더 이상 교도대를 뽑지 않겠다는 정부의 시책이 전달됐다. 군인 수가 점차 줄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유명무실한 교도대교회가 될 위기에 처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던 도중 김 목사의 마음에 잠시 손을 떼고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쉬는데 기도중 하나님께서는 교정선교를 사명으로 주신 이유를 다시금 깨닫게 하셨다. 제주에서 하나님께 했던 고백을 기억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더욱 큰일을 행하셨다.

이제 ‘홍성교도소경비교도대교회’는 ‘홍성교도소교회’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더 이상 교도대원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 이제는 교도소의 직원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곳이 되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승진시험을 준비했던 여러 직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단번에 시험에 합격하는 일도 있었다.

“집 주인을 전도하면 그 가족을 전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김 목사. 그는 이제 교도소의 재소자들을 넘어 직원들과 함께 온 교도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기도하고 있다.

#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김 목사는 교도소에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적용해보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경교대교회에서 시작한 ‘브니엘성경대학’을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으로 바꿨다.

이를 통해 재소자들이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출소 후 신학공부를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애당초 있던 ‘브니엘성경대학’을 통해 경비교도대원 중 몇 명은 신학대학으로 진학하여 목사가 되기도 했다.

또한 ‘아버지학교’를 개설해 재소자들이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좋은 아버지가 되어 출소 후 자녀들과 값진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재소자들로 아버지학교는 은혜 속에 끝마쳤다.

교도관으로 일하며 월급의 대부분을 전도와 없고 굶주린 이들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사용했던 김 목사. 하지만 그의 아내는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

사랑하는 가족보다 재소자, 출소자에게 많은 관심을 쏟은 지난날 때문에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은 것을 김 목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가족들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 뿐이다.

김 목사는 “내가 돌보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키워주셨다”며 “하나님께 늘 감사하다”고 말했다. 또 “딸은 신학을 공부해 군포 청소년 쉼터에서 청소년 사역으로 섬기고 있고, 아들 또한 신학을 공부해 마음이 뿌듯하다”며 “부족한 아버지 밑에서 풍족하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도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준 자식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김 목사는 최근 ‘갇힌 자들과 함께 부르는 희망의 노래’라는 책을 출간했다. 책의 인세를 김치공장이 세워지는데 보태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움이 따랐다. 처음 계약을 했던 출판사와는 이야기가 잘 되지 않아, 그 피해가 고스란히 김 목사에게로 돌아왔고, 우여곡절 끝에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 교도소 내에서 열린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브니엘성경대학 입학식

# 그의 소망 ‘김치공장’
김 목사는 “교도소 내에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한 재소자들은 사회를 저주하게 되고, 자신의 잘못은 까맣게 잊고 출소 후 다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그래서 홍성교도소 3백여 명의 재소자에게 무작위로 영치금을 넣어주고 있다. 영치금을 받을 곳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의 특별한 배려다. 다른 종교라도 상관없다. 다만 김 목사의 모습에서 그들이 우리를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길 바랄 뿐이다.

재소자들이 출소 후 다시 범죄에 가담해 교도소를 찾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출소 후 자리 잡을 곳이 없다고 전과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던 교도소에서 나와 바라본 세상은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다. 때문에 김 목사는 대안으로 ‘김치공장’을 생각한다. 출소한 사람들을 김치공장으로 불러 자립에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일정의 수익을 주고, 또 공장에서 만들어진 김치를 교도소에 납품할 생각이다. 누구보다 재소자들의 마음을 잘 아는 ‘재소자들의 아버지’ 김 목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김봉래 목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가 재소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분이 미처 하지 못하신 일을 예수님의 자녀된 우리가 시작해야한다”며 “한국 교회가 교정 선교에 더욱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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