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총-찬송가 갈라지고, 제3의 기구 논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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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찬송가 갈라지고, 제3의 기구 논의까지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2.03.05 1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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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한국 교회 다시 세우자 (4)- 갈라지는 ‘연합’ 이대로 좋은가(상)


선교 위해 하나된 연합기관 ‘이익과 권력’에 눈멀어 분열

선교 초기, 하나의 교회는 실패했지만 사업적 연합 구체화

보수교회를 대변하기 위해 하나로 모였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두 갈래’로 갈라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창립 23년 만에 맞이한 위기다. 심지어 ‘해체’에 대한 목소리까지 높아지고 있다. 어차피 태생부터 기형적이었으니 내부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을 때 차라리 해체하자는 주장이다. 한국 교회 대표를 자청하며 교계 안팎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온 한기총의 갈등과 분열의 원인은 지나친 힘의 집중에 있었다. ‘기독교 대통령’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권력을 자랑하는 자리가 생겨났고, 그 권력을 향한 욕망이 곳곳에서 솟구치면서 결국 분열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단 한기총의 문제만은 아니다. 2012년 한국 교회 연합운동과 연합사업은 몰락 일변도를 걷고 있다. ‘연합’의 아름다운 산물로 여겨진 찬송가도 곧 두 개로 분열을 예고하고 있고, 지난해 연말 저작권이 만료된 개역한글판을 중심으로 성경 사업도 우후죽순 생겨날 것으로 보인다. 진보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한 기여와 세계교회와의 친밀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형교단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재편논의가 일고 있다. 교회의 대형화 및 물량주의의 영향은 한국 교회 연합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명령이 이제 한국 교회에 무색할 정도다. 연합운동과 연합사업 최초의 목적과 역사, 그리고 최근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분열의 이유를 살펴보았다. <편집자 주>

# 한 지붕 두 가족 논의의 출발

지난 2003년 한국 교회 안에서는 ‘한 지붕 두 가족’ 논의가 한참이었다. 교단장협의회를 중심으로 교회협과 한기총이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7대 원칙’에 합의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7대 원칙은 △하나의 신앙고백(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하나의 연합기구를 조직한다) △교회의 책임완수(다양성 속의 일치를 지향하며, 선교와 사회적 책임을 함께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연합기구 조직) △연합운동의 계승 발전 △한국교회의 공 교회성 △공동선교와 협력 △연합정신의 확산 △미래를 향한 열린 연합(하나 된 연합기구의 조직은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목적이거나 최종 결과가 아니라 시작이며, 분열된 교회들의 연합, 건전한 신학교육을 통한 한국 교회의 궁극적 일치를 지향) 등을 내세웠다.

당시 교단장협의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분열의 죄책을 고백한다”며 “지난 1백년 간 이어온 교회 연합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교회의 책임을 다하는 연합기구 결성을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하나의 연합기구’ 논의는 사라졌다. 오히려 기존의 연합기구들만 내홍을 겪으며 갈라지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교회협은 너무 ‘이념적’이고, 한기총은 너무 ‘정치적’이라는 우려 속에서 존립이 위협받고 있다. 연합사업 역시 더 이상 ‘하나의 산물’을 내기 어려울 전망이다. ‘연합사업=돈’이라는 왜곡된 공식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3일 미래목회포럼은 ‘새로운 연합기구’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 자리에서 ‘한국 개신교회 일치와 연합운동의 역사적 흐름’에 대해 정리한 이덕주 교수(감신대)는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는 분열과 갈등의 역사를 이어왔다. 하지만 ‘하나 되게 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며 일치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 2000년 역사에서 한줄기 흐름을 유지하게 했다”고 말했다. 분열의 아픔 속에서도 ‘하나’를 위한 사명이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그러나 최근 한국 교회는 갈라지고 나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며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하나 되지 못하고, 사안마다 다른 소리를 내며 서로를 비판, 정죄하는 모습을 이제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한국교회 초기 연합운동

1884년 각각 다른 통로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된 개신교회에 대한 열망을 안고 있었다. 호주와 미국 북장로교회는 1889년 ‘연합선교공의회’를 결성했고, 해체와 재조직을 거치면서 장로교 독노회가 탄생할 때까지 실질적 정치기구 역할을 감당했다.

1905년에는 장로교 4개 선교부와 감리교 2개 선교부가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라는 이름의 협의체를 결성했다. 한국에서 유일한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를 조직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하나’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연합공의회는 여러 차례 모임을 가졌지만 결국 “한국에서 하나로 조직된 교회가 취할 완벽한 정치체제를 제시하기 보다는 실제적인 면에서 가능한 것부터 조화를 추구해 나감으로 우리 교회 생활을 정착시키고 우리가 취하고 있는 초교파적 협력관계에 있어 야기될 수 있는 마찰의 요인을 제거하는데 즉각적인 효력을 얻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하나의 교회를 포기한 채 사업적 연대를 추구하기로 했다.

이렇게 태동한 최초의 연합기관이 1890년 세워진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 성서번역과 문서출판을 일단 하나로 묶어내자는 것이었다. 첫 작업은 찬송가 통합. 장로교의 ‘찬양가’와 감리교의 ‘찬미가’를 합해 1908년 ‘합동 찬숑가’를 출판했다. 연합 사업의 첫 번째 수확물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선교 초기 한국 교회는 단일 개신교회를 조직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지만 기존의 초교파 연합운동이 더욱 강화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연합사업이 추진됐다”고 설명했다. 연합사업의 역사적 명맥은 현재 기독교서회와 성서공회가 이어가고 있다. 이후 찬송가공회도 한국 교회를 하나로 묶는데 큰 기여를 했다.

연합운동의 경우 가장 대표적인 기관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일제시대 친일 연합운동 단체들이 등장했고, 이 단체들은 친일 어용세력을 양성하거나, 한국 교회를 일본에 예속 시키고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조직됐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해석이다.

하지만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단일 교회 조직’으로 하나의 교회라는 전통을 이어가자는 주장과 기독교 건국이념과 적치 역량 극대화를 위해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자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1946년 조선기독교연합회가 탄생했다. 이 단체는 1938년 해산된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를 재건하는 형태로 조직됐으며, 지금 교회협의 전신이다. 조선기독교연합회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한국기독교연합회’로 이름을 바꿨으며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관련을 맺기 시작했고, 이후 에큐메니칼운동의 구심점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WCC 문제는 각 교단들을 둘로 갈라놓는 원인이 되기도 해,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1960년대까지 지속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 초기 연합운동과 연합사업을 다시 되짚어야 하는 이유는 당시 ‘연합’이 어떤 형태로 운영됐는지 원형을 찾아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성장을 거듭한 한국 교회는 물량적 힘을 갖추면서 ‘정치 세력화’ 되기 시작했고, 공교회성보다 ‘대형교회’ 중심의 개교회주의가 강화되는 조짐이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 들어 연합운동의 분열과 갈등으로 표출됐다.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오직 ‘선교’에만 목적을 맞추던 사업들은 ‘이익과 권력’으로 변질되면서 추잡한 싸움으로 이어졌다. 한기총과 찬송가의 분열 뒤에 이러한 원인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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