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서 (92강) 유다 공격한 이스라엘 베가와 다메섹의 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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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서 (92강) 유다 공격한 이스라엘 베가와 다메섹의 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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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2.15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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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왕 아하스의 통치

아하스의 통치에 대한 종교적 평가는 다윗과 같지 않으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열왕기하 16:1~20은 유다 왕 아하스의 통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하 16장과 역대하 28장의 기록에 의하면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20세 되던 해인 베가 17년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6년을 치리하였다(주전 743~733 섭정; 733~727년).

그의 업적에 대하여 열왕기하 16:1-20절과 역대하 28:1~7, 16~27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가장 큰 사건은 이스라엘의 베가와 다메섹의 르신이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한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다. 뿐만 아니라 에돔, 블레셋 사람들의 노략이 심하였다(대하 28:16).

열왕기하 16:5절 이하에서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자 아하스는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디글랏빌레셀 3세는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여 그 백성들을 기르로 잡아갔고, 아람의 왕 르신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6:9).

이 처럼 디글랏빌레셀 3세가 아하스 왕의 통치 때에 아람을 공격한 것은 주전 734년부터 732년까지의 아시리아 제국의 에포님에 잘 나타난다. 에포님 명단에 의하면 디글랏빌레셀 3세는 주전 734년에 블레셋과 전쟁을 벌였으며, 주전 733년과 732년에는 다마스쿠스로 진격하여 주전 732년에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아시리아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1~2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 베가 17년에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유다의 왕이 되어 16년간 통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하스의 통치에 대한 종교적 평가는 다윗과 같지 않으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한다.

3절에서는 아하스가 종교적으로 이러한 평가를 받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였기 때문이다. 레위기 20:23에 의하면 이방의 풍습을 따르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20:3에 의하면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아하스는 근본적으로 여호와 이외에 이방신을 섬겼던 것이다. 특히 가증한 일이란 성경에서는 주로 우상을 섬기는 일에 대한 표현이다. 뿐만 아니라 4절에 의하면 아하스는 산당과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5~6에서는 아하스는 아람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으나 아하스를 이기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람의 왕 르신이 엘랏(Elath)을 회복하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모두 쫓아냈다.

그 결과 아하스는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빌레셋 3세에게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왕의 신복’과 ‘왕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아하스가 디글랏빌레셋 3세에게 복종함을 의미한다. 이를 위하여 위하여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다.

9절에 의하면 아하스의 도움 요청을 받은 디글랏빌레셋은 다메섹을 공격하였고 그 사람들을 기르로 잡아갔다. 이 사건은 아모스 1:5에도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주전 733-732년에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10~18절에 의하면 아람에 있는 디글랏빌레셋 3세을 만나기 위하여 아하스가 다메섹을 방문하였고, 그때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 제단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렸다. 아하스는 여호와를 위하여 우상의 제단의 방식대로 만들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다마스쿠스를 방문했던 아하스가 다마스쿠스의 제단을 보고 예루살렘에 새로운 제단을 만들 것을 대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한다(왕하 16:10~18). 이 본문을 근거로 많은 학자들은 아시리아 제국의 종교가 이스라엘로 유입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기록 문서에 근거하기 보다는 근대의 제국주의의 정책을 바탕으로 고대 사회의 현상을 유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코간(M. Cogan)이나 맥케이(J. McKay)]는 아시리아 제국은 봉신국가에 대하여 아시리아 제국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봉신국가가 아시리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어 속주가 되어야 아시리아의 신도 섬기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북 왕국이 봉신국가에서 속주로 그 위치가 바뀌면서 사마리아에서 아시리아 신을 함께 섬기게 되었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왕하 17:24~41).

코간은 열왕기상 16:10~18절의 기록 가운데 제물을 불사르고 피를 단 위에 뿌리는 의식(15절)은 아시리아의 제의와 다른 것이며, 아하스가 다마스쿠스에서 보고 새로 지은 제단은 메소포타미아의 제단이 아니라 아람의 제단이었다고 주장한다.

19~20절은 다른 왕들의 통치기록을 마감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아하스의 업적이 유다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가 장사되고 히스기야가 그의 뒤를 이은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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