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기도하는 자유가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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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기도하는 자유가 그리웠다”
  • 이덕형 기자
  • 승인 2012.01.18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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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소에서 그루터기 신앙 지켜낸 새터민 박문희 집사

북에선 성경도 찬송도 지하교회도 본 적 없어
고 김익두 목사 손자 며느리로 60년 신앙지켜


박문희 집사는 올해 환갑을 훌쩍 넘긴 65세다. 65년의 세월 중 64년은 북에서 지냈다. 국내에 들어온 것은 봄 냄새가 물씬 풍기던 지난해 4월이었다.

국내에서는 고(故) 김익두 목사의 손자며느리로 더 잘 알려진 그녀가 사실 한국으로 들어오기 위해 노력한 것은 지금까지 총 세 번.

그래서 압록강을 세 번을 건넜지만 두 번은 다시 북으로 송환되어 수감되는 아픔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 속에서도 지켜온 신앙생활, 차가운 압록강을 지나 걸어 내려온 신앙의 여정을 함께 되짚어 올라가 봤다.

# 다 죽은 그루터기에도 새순이 돋는다
“그루터기는 겉보기에는 다 죽은 것 같아도 새 움이 틉니다.”

독산역에서 공장 사이 좁은 길을 따라 걸었을 때 입을 처음 연 박 집사는 북한 지하 교회 그루터기 신앙에 관해 이 같은 생각을 전했다. 사실 박 집사는 아직까지 북한에서 직접 지하 교회를 본적은 없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곳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노출되어 보위부 귀에 들어가면 목숨을 잃습니다. 총살 아니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됩니다. 북한에서는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가면 짐승보다 못한 핍박과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못나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박 집사는 북한에 있을 때는 한 번도 성경을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제가 있던 함경북도 청진에서는 성경을 구경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여기와서 놀란 점은 남한 교회에서 선교를 위해 북한지하교회와 연락하고 또 작은 성경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성경을 처음 접한 것도 살기위해 1998년 친척을 만나러 중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였습니다.”

북한에서는 성경을 구할 수 없었다. 이전에 익혔던 사도신경조차 중국 국경 넘어 가정 교회에 참석했던 한 성도가 손톱만한 종이에 깨알 같이 적어 숨겨온 덕분이었다. 그래서 박 집사는 중국에서 성경과 찬송가를 읽고 또 읽었다. 북에서는 찬송가나 성경 없이 예배를 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신앙은 가족에게까지 비밀로 할 정도였기 때문에 지하교회간 연계가 활발할 수 없었다. 일종의 점조직 형태가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박 집사는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접 지하 교회를 만든 적은 있었다. 사소한 것도 다 고발되는 그 곳에서 박 집사는 한 사람 한 사람씩 전도하기 시작했다.

“전도하기 전 먼저 그 대상을 두고 몇날 몇일이든 계속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사람의 행동, 말, 생각을 관찰한 후 전도 대상을 결정하지만 그래도 두렵고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보위부 사람들이 가까이 올 때는 언제나 주님께 떨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나이가 많은 70대 할머니를 대상으로는 넌지시 성탄절이나 교회 관련 단어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예배도 마찬가지로 마음껏 집에서 드릴 수 없었다. 주위에 눈과 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배는 창고나 숲과 같이 집이 아닌 곳, 사람이 없는 곳, 의심받지 않는 장소를 주로 택했다. 성경은 박 집사가 암송한 구절을 통해 서로 외우는 형식으로 전해졌고 찬송도 마찬가지로 기억 속에 저장하는 형식으로 퍼져나갔다.

박 집사에게는 그 중에도 신앙을 이어가기 위해 감옥에서 두 세 명이 모여 신앙생활을 유지해간 경험은 특별하다.

“주일이면 악취로 얼굴이 따갑고 눈까지 매운 재래식 변소에 서너 명이서 모여 남몰래 잠깐씩 예배를 드렸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께하면 그 속에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을 붙잡고 만들어진 작은 교회였습니다.”

빈대와 이로 가득한 악취나는 감옥 안에서 신앙생활은 그렇게 유지됐다. 한 번은 찬송을 부르다 간수에게 발각되어 매질을 당하고 벌을 서는 고초까지 겪었지만 그나마도 운이 많이 좋은 경우에 속했다.

교화소 안 하루의 시작은 작업장으로 나가는 아침에 서로 손을 붙잡으며 나직이 ‘할렐루야’와 ‘아멘’을 나직이 외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남성의 몸으로도 견뎌내기 힘든 노역 작업. 교화소에서의 노역은 주로 중노동이었다. 인분과 흙을 섞어 거름을 만들어 들것에 가득 담은 후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일을 하루 종일 반복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역 때문에 교화소 안에서는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난 성도도 있었다. 피부병과 열병에 시달리는 일은 보통, 굶어 죽는 것 조차도 그 곳에서는 더 이상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60세 된 성도 한 분이 노역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씹을 수 없어 배급되는 밥을 돌로 갈아 부드럽게 해서 먹였습니다. 그렇게 떠나가는 과정이 너무나 비참하고 안타까워 약도 구해보고 남 몰래 돌봤지만 결국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중에 그 분이 저에게 유언을 남기더군요. ‘나는 죽어도 천국에 가니 울고 싶지 않습니다. 자매님은 살아서 마음껏 소리쳐 기도하고 예배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길 바랍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눈과 귀가 많은 교화소 안. 그래서 기독교 관련 단어를 입에 올리거나 찬송가를 부르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다. 죽어가던 성도가 남긴 마지막 유언인 ‘신앙의 자유’는 그렇게 박 집사의 마음에 계속 남아있었다.

# 나눔과 십일조, 그 의미
박 집사는 압록강을 두 번이나 건넜지만 모두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으로 호송됐다. 북에서도 세상 끝이라고 부르던 교화소를 포함해 보위부, 단련대, 도집결소, 보안소, 보안소구류장까지 이어졌던 세월. 처음 그 곳에 도착했을 땐 3일간 이어진 모진 고문과 발길질을 견뎌내야 했다. 그렇게 각기 다른 수감소 문턱을 10번이나 넘나드는 동안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박 집사는 그 곳에서도 신앙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십일조에 대한 신앙관이 있었다.

“처음 탈출해 중국에서 성경을 접한 뒤 십일조를 알게 됐습니다. 다른 집 가정부로 있으면서도 받은 돈을 빠지지 않고 내게 되었을 때는 또 다시 십일조를 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상투적인 말은 아니었다. 북에서 나눔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었고 특히 돈에 있어서 의미는 더욱 그러했다. 돈이 떨어지는 순간 내 생명도 끝자락에 와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북에서는 나눔 자체가 생명을 나눠 주는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래도 박 집사는 십일조를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죽지 않고 내일을 살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며 십일조에 대한 생각을 전했다.

“그 곳에서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나누거나 돈을 쓸 수는 없습니다. 그 것이 떨어지는 순간 내가 죽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곳보다 그 땅에서 돈과 생명은 더욱 직결 되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북에서 나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십일조였다고 생각합니다.”

박 집사의 딸은 그 나눔이 없어 27살의 나이에 굶어서 죽어야만 했다. 그런 결심에도 감옥 안 현실은 중국에서와 같이 십일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 집사는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배급 받는 보잘 것 없이 적은 밥부터 나누기 시작했다. 탈북을 시도해 굶주림에 지쳐 있던 젊은 청년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6년이 지나 감옥을 나오는 날도 박 집사는 자신에게 지급된 모든 물품을 남은 이들에게 다 나눠줬다.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가 교화소에서 나올 때의 전부였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데도 갈 곳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그 곳을 나선다는 게 무엇을 뜻 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아있던 성도들은 헤어지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 내게 남은 신앙 유산
박 집사가 탈북한 것은 2010년 10월이었다. 당시 벌써 세 번째 건너는 압록강이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강가에 이르러 물속에 들어갈 때까지 속으로 김석균 선교사가 쓴 찬송가 구절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내가 너를 들어 쓰리라’라를 반복해서 불렀다.

“이루어질 것을 믿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강에 가면서도 물에 빠져서도 불렀습니다. 차가운 물길을 걸어 절반도 이르지 못했는데 물속으로 계속 빠져들었습니다. 헤엄을 못 치는 상황에서 손을 들어보니 손가락 끝은 여전히 물 속 이었습니다.”

온 몸은 물살과 함께 부딪혀 오는 돌 조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정신없이 흘러가다가 기운이 다할 때 쯤 ‘이대로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내 영혼을 받아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올릴 때쯤 박 집사는 몸이 물가로 밀려나오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목숨을 걸고 지켜온 신앙생활, 박문희 집사가 남기고 싶은 신앙의 유산은 어떤 게 있을까. 박 집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라고 답했다.

“그 어느 곳에 있던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따라갈 수 있는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박 집사는 신앙의 유산을 지켜냈다. 그런 그가 남한 교회 성도들에게 말했다.

“신앙의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지요. 말씀을 읽을 수 있을 때 매일 많이 읽어두고, 비록 내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북한에 비할 수 없는 감사한 믿음의 환경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박해를 견뎌낸 그녀의 강철같은 신앙은 복음이 흔한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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