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전하는 '예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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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전하는 '예수사랑'
  • 승인 2002.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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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산 김영철화백은 30여 년동안 불우한 이웃을 돕기위한 그림을 그려왔다. 1993년 한국미술대전 종합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실력이 탄탄한 김화백이지만 일반 유명화가들과는 다르게 부와 명성보다는 불우한 이웃을 돕거나 낙도나 오지, 타국에서 선교를 하는 목회자들을 후원하는 일에 붓을 사용했다.

실제로 석산은 불우청소년돕기전시회, 사랑의전화 기금 마련 전시회, 도서지역 기독교역자 돕기 전시회 등 무수한 후원전시회를 통해 일정액을 교회와 불우한 이웃을 위해 헌납할 정도로 자선사업에 열심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들이 가능했던 것은 석산의 그림에는 복음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감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일반의 경우 창작이라는 것이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탓에 술과 담배 등의 도움을 많이 받지만 김화백의 경우 그림을 그리기전 하나님의 영감을 얻기위해 끊임없이 기도한다. 자신의 달란트를 선교의 도구로 삼겠다는 다짐을 했던 만큼 신앙적 근간이 없다면 무익하다는 생각에서이다. 이런 소신탓에 그의 그림에는 신앙과 예술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전남여수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석산은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우며 화가에 대한 꿈을 키웠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석산은 군입대를 자원했고 그의 꿈은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재능을 인정받아 군의 지원으로 그림도 그리고 유명화가들에게 미술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석산은 결혼과 함께 방위산업체에 보일러공으로 취직을 한다.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병든 아내의 전폭적인 후원과 함께 신앙의 뒷받침으로 화가에 대한 꿈을 키우며 그림작업에 몰두했다. 신앙에 눈을 뜬 김화백은 틈틈이 짬을 내어 노방전도를 다니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출했고 밤을 새워가며 그림을 그렸다.

석산의 이러한 열정은 몇차례의 낙방 끝에 1987년 서울미술대전 특선의 영애를 안았고 1993년에는 한국미술대전종합대상 수상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회사안에서 신우회를 결성하며 자타가 공인하는 신앙인이었던 석산이었지만 늘 그림이 불만족스러웠다. 평범한 동양화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듯한 그림에 회의를 느끼고 1995년 신학교에 입학한다.

성경과 하나님을 제대로 배워 화폭에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정작 그림에 대한 꿈이 컷던 석산의 입장에서는 미술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신앙에 대한 열정이 모든 것을 압도했고 지난 1999년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었다.

김목사의 이런 애틋한 마음이 최근 어려움에 직면했다. 수 십년 장인문화를 지켜온 석산의 입지가 퇴색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콘서트 등 여타의 문화행사에는 교회와 성도들의 후원이 답지하지만 미술전시회 등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기 때문이다.

IMF 전만해도 작품활동의 여건이 원활했지만 지금은 생활에 위협을 받을 만큼 어려운상황이다. 더욱이 기독예술인의 맥을 이어가기위해 장인정신을 가진 후배들을 육성해야 하지만 열악한 환경탓에 선뜻나서는 젊은이도 없고 김화백 자신조차도 독려할 수 없는 상황이다. 경제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기독교미술계의 뼈아픈 현실에 말문히 막힐 정도이다.

김화백은 최근 브라질미술대전의 심사위원으로 초청을 받았다. 자비량으로 엄두도 못낼 일이지만 현지의 도움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석산은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현지에서의 전시회의 기대를 걸고 있다. 자신의 전시회를 통한 수입으로 오지선교사를 도울 수 있지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이다.

기독교계의 홀대에 등을 돌릴법도 한데 석산은 요지부동이다. 선교와 구제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사용해 큰일을 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항상 한다”며 김영철화백은 오늘도 신앙의 열정을 화폭에 조심스럽게 옮겨놓는다.

김광오기자(kimk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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