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촌뜨기, 하나님의 나팔수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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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촌뜨기, 하나님의 나팔수 되다
  • 김목화 기자
  • 승인 2011.06.17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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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M 사역자로 작은교회 섬기는 색소폰 연주자 강기만 씨

“부족한 연주지만, 이 소리로 인해 위로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소망해요. 
작은 교회들이 부흥하는 힘도 얻길 바랍니다.”
 

‘강기만님이 김목화님 담벼락에 글을 남겼습니다.’

페이스북 알림 공지에 빨간색 숫자 ‘1’이 표시됐다. 누군가 내게 글을 남겼다. 강기만.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신상정보부터 확인했다. ‘CCM 찬양사역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색소폰 연주자였다. 메시지 내용은 대략 “친해지고 싶어요^^”. 안 그래도 ‘취재거리’를 찾아 나서던 참이라 ‘옳다구나!’ 무릎을 치며 바로 답장을 했다. 메시지는 전파를 타고, 3일 후 일산 L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찬양사역자 ‘강기만’씨를 만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는 ‘동안’이었다. 말투도 깜찍했고 삐죽이는 번개 머리로 그의 활발한 성격을 가늠할 수 있었다. 맛있는 음식이 앞에 놓였다. 젓가락보다 취재수첩과 펜을 먼저 꺼내들자 강 씨는 고개를 쑥 내밀며 “나, 취재보다는 친해지고 싶어요”라고 건넸다.

그를 만나기 전날, 페이스북에 그가 남긴 글을 보니 여러 차례 중국에서 공연도 하고, 여수 MBC 라디오에도 고정 출연을 한단다. 세간에 알려진 여느 유명인들처럼 어릴 적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을 줄 알았던 그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올해로 나이 서른여덟, 이제 9년 차에 접어드는 늦깎이 색소폰 연주자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수년간 공부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구수한 사투리가 섞여 나오는 자칭 ‘여수 촌뜨기’였다. 게다가 기계공학과를 나와 대학 졸업 후 바로 직업군인에 뛰어든 장교 출신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국내에 손꼽히는 CCM 색소폰 연주자가 되었을까. 그가 더 궁금해졌다.
 
# 색소폰은 내 운명
“중학교 시절에 우연히 친구를 따라서 교회에 갔다가 하나님을 만났어요.”
깊은 찬양연주에 신앙 깊은 모태신앙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친구를 따라 교회 문턱을 넘나들다 그때부터 기타를 메고 10여 년 넘게 꾸준히 찬양인도를 했다. 대학 시절엔 CCC(한국대학생선교회) 협동간사로 섬겼다. 그가 찬양인도를 하면 온 성도들은 은혜의 물결에 감동받았다. 그는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깊은 감동에 빠져들었다.

리더십을 갖고 싶어 지원했던 장교 시절, 전역하는 후임들에게 기억에 남을 감동을 주고 싶어 고민하던 5년 차에 우연인지 운명인지 강원도 산골 부대 앞에 색소폰 강습소가 생겼다. 바로 강습소에 등록하고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열심히 배우고 연습했다. 후임들을 떠나보내는 고별의 자리에서 두 번의 연주를 했다. 그리고 그는 전역했다. 색소폰 연주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색소폰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전역 후 바로 예술대학에 진학했다. 색소폰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었다.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가난하고 능력도 없고 교회만 안다’고 비난하는 비신앙인들의 말이 듣기 싫었다. ‘돈이 안 되는 교회 연주를 왜 하느냐?’고 묻는 비신앙인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분명히 잘된다”는 믿음이 강 씨의 마음속에서 강하게 외치고 있었다.

예술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고향 순천으로 내려가 실용음악학원을 차렸다. 그리고 다니던 교회 목사님을 통해 교회 부흥회에서 연주와 간증 사역을 하게 됐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찬양 부흥회가 끝나면 사람들이 앞다투어 줄을 섰어요. 사인회는 계획에도 없었는데 사인을 해달라고 하는 바람에 한 시간 넘게 사인회를 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점점 이름을 알리게 된 그는 순천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얼마나 올까. “처음 혼자서 시도한 콘서트라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얼마나 많이 왔는지 알아요?” 대성공이었다. 공연장은 가득 메워졌고 5백여 명의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두 번째 공연에서는 1천여 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어느 국회의원은 우연히 초청받아 그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 한 소절 한 소절 그가 부르는 멜로디마다 가슴 깊이 울려왔고 그 울림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감동의 선물을 받은 의원은 “후원자가 되겠다”며 강 씨의 손을 잡았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메일을 주고받으며 멘토가 되어주었고 결혼식에서 축연까지하는 사이가 되었단다.

“참 신기해요. 연주를 통해 맺어진 분들의 사랑과 후원으로, 돈벌이가 된다는 세상 연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연주를 마음껏 할 수 있었죠.” 생각지도 않았던 복이 터졌다. 물질적 지원만이 아니었다. 그의 공연장에 왔다가 영적 멘토로 나서겠다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후원자들도 늘어났다. 

금상첨화란 이럴 때 쓰는 말 아닐까. 하나님은 그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셨다. 국내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내건 ‘강기만 시그니처 소프라노 색소폰’이 탄생한 것. 색소폰에 강기만의 이름이 새겨져 나오는 것이다. 매년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색소폰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색소폰 연주자를 꿈꾸는 이마다 강기만을 떠올리며 연습하고 있다.
 
# 기만이의 음악스케치
4년 전, 여수 MBC ‘별이 빛나는 밤’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된 적이 있었다. 그 후 반응이 좋아 고정으로 출연해 ‘기만이의 음악스케치’를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다. 또 ‘정오의 희망곡’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해 음악과 관련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음악적 감성은 글에도 묻어났다. 그의 음악은 책으로 출간됐다. 그리고 책을 낸 출판사에서 음반작업도 같이 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렇게 만난 유명한 음악 프로듀서들과 지금도 함께 일하고 있다. 최근에 영화 ‘회초리’ OST를 연주했고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 임형주와도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작은 교회와 네트워크를 형성해 색소폰 연주 모임과 교육 모임 그리고 간증 모임을 갖고 싶다”고 했다. 또 열악한 환경 탓에 음악과는 거리가 먼 작은 교회들을 돕고 색소폰 연주로 치유와 부흥이 일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평신도 사역자로서 평신도를 위해 쓰임 받고 싶다는 그. “부유한 사람들이 취미로 하는 것이 색소폰이에요. 하지만 누구나 쉽게 색소폰을 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최근 작은교회살리기연합(대표:정성진 목사)의 문화사역팀장을 맡았고 색소폰 무료 공연을 열기로 했다.

# 하나님이 선택한 연주자
사실 그는 어렸을 적 술집과 러브호텔이 즐비한 유흥가에서 자라났다. 모텔을 운영하던 아버지께서는 술만 드시면 으름장을 놓으며 자주 화를 내셨고, 그와 누나 둘은 어릴 적부터 아르바이트하러 다니기에 바빴다. 그랬던 그가 학생 시절에는 교회 찬양사역자로 섬겼고, 지금은 정상의 자리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색소폰 연주를 하고 있다. 그는 “색소폰은 내 삶의 터닝포인트”라고 말한다. 색소폰을 통해 온 가족을 변화시켜 지금은 믿음의 가정으로 우뚝 섰고 그의 삶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연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늘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이 이끄는 삶에 전심으로 순종하며 마음을 다한다는 그는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삶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인터뷰를 마치고 다음 만남은 꼭 공연장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며 그와 헤어졌다. 알고 보니 그는 색소폰 연주뿐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많은 사역을 감당하며 봉사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쓰임 받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회복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해 본다.
 
다음날 페이스북에 알림이 떴다. 이번에도 강 씨였다. 만나서 반가웠다는 메시지였다. 이젠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그에게 답장을 했다. “저도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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