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죽음의 고비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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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죽음의 고비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죠”
  • 현승미 기자
  • 승인 2010.11.24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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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에게 물려줄 신앙의 유산 ‘비망의 추억담’ 펴낸 이 용 준 장로

인사조차 못하고 떠난 피난길, 55년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파 신앙 가져

일제치하에서 태어나, 우리 말, 우리 글이 억압받던 시절 초등학교를 다녔다. 강제로 창시개명을 해야 했고, 추수한 대부분을 일본에 받쳐야 했기에 삶은 궁핍했다. 간신히 일제치하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려던 찰나, 이번에는 남과 북이 갈라져 서로 죽고 죽이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932년도에 태어나 역경과 고난의 세월을 넘어 이제 80세를 앞두고 있는 이용준 장로. 그는 최근 후손들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부모, 조부모에 대해 무관심한 후손들에게 자신의 믿음과 삶의 모습을 전하고 싶었다. 지금은 부강해져 먹고 입을 것이 넘쳐나는 세대들에게 과거 나라 잃은 설움에 힘겨웠던 나날들을 이야기 해 주고 교훈을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신앙자서전 ‘비망의 추억담’(꿈의 날개)을 집필했다.

“철없는 마음으로 남과 같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지 못하는 것에 개탄한 적이 많이 있었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러했던 삶이 감사하게 느껴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런 어렵고 힘들었던 삶을 해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삶에 대해 이토록 감사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감사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고백하는 이용준 장로. 그는 어린시절 몇 번의 죽을 고비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줄도 몰랐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태어나기 이전부터 아시고 다스리셨죠. 초등학교 시절 내가 높은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도, 인민군에 붙잡혀 꼼짝없이 군에 동원됐을 때도 하나님은 매번 저에게 새 생명을 허락하셨죠.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저를 위해 그 모든 것을 미리 예비해 두셨던 거죠.”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이 장로의 가족들은 6·25전쟁 당시 황해도 연백에 살고 있었다. 가난에 못 이겨 살 궁리 끝에 정부의 이주정책에 따라 그곳에 정착하게 된 것. 전쟁 후 처음 형과 함께 피난길에 나섰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홀로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전쟁은 끝날 줄 몰랐고, 결국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정부당국에서는 남쪽바다 근처 사는 사람들을 전부 북쪽으로 이주시켜 피난길을 완전 차단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덕분에 이 장로 집에도 이주민 중 한 명이 기거하고 있었다. 마침 추수철이 되자 정부는 각자의 지역에 돌아가 추수해올 것을 명령했고, 그 틈을 타 이 장로는 영남이 고향이던 그 이주민을 따라 피난을 가게 됐다.

“그때 부모님께 작별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떠나왔죠. 늦가을이라 날씨가 제법 쌀쌀한 편이었어요. 형수님께서 장갑을 챙겨주시는데 한 일주일만 피해있다가 돌아올 것인데 무슨 필요냐고 거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오늘에 이르기까지 55년이 이르고 말았지요.”

그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하다 생활비가 바닥이 났고, 결국 배급받아서 생활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배급을 받으려면 주소지가 확정되고 명단이 반장을 통해 등재되어야 했다. 그래서 주소지를 옮겨서 정한 곳이 교동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교동감리교회의 사택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신앙여정을 이곳에서 시작케 하셨다.

“그곳에서 우연히 신영건이라는 분을 만나게 됐습니다. 연백에 있을때 우리 집 옆에 있던 작은 집에 다니러오면 항상 저를 붙잡고 전도를 했었죠. 그 분의 어머니 역시 만날때마다 전도를 열심히 하셨죠. 참 좋은 분이었는데, 당시 저는 믿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사람 구실 못하는 사람인양 비방했었죠.”

하지만, 낯선 곳에서 만난 유일한 ‘아는 사람’이었기에 이 장로는 그를 의지했다.
목숨만 겨우 연명할 정도의 배급쌀, 알랑미로만 생활한지 어언 몇 개월. 그의 유일한 낙은 사택 위쪽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여느 때와 매한가지로 그날은 수요일 예배를 드리는 저녁, 예배당 맨 뒤쪽 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대표기도를 하는 여성도가 애절한 울부짖음으로 나라를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스스로 자문자답을 했지요. 저 사람은 여자인데 여자의 마음으로도 저렇게 나라를 위해 울부짖으며 기도하는데 나는 남자 아닌가, 다른 것은 못해도 나도 예수 믿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라도 해야겠다는 마음과 생각이 나를 휘감았습니다.”

그때는 구원이고 천국이고 전혀 생각지도 알지도 못했다. 다만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이 한가지만이 그의 작정이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섭리였다.

“예배시간에 예배 구경하러 가게끔 마음을 인도하심이나 여성도의 기도를 들을 때 내 마음을 감동시키사 예수 믿어야겠다는 마음이 일게 하신 것과 예수 믿겠다고 고백한 일 등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이 역사하사 이루어진 사실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 후로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면서 때때로 겪었던 모진 고생의 생활도 지금 생각하면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의 유익을 도모하는 생활이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이용준 장로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히고 말았다. 언제까지 그곳에 머무를 수 없어 그는 태어났던 창녕으로 이주했고, 집안 어른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생을 연명했다. 창녕에 내려오면서 자신의 신앙적 멘토였던 신영건 씨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됐고, 머슴살이를 하면서는 더더욱 교회에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하나님께 멀어져가던 이 장로를 하나님은 좋은 인연을 내려주심으로 붙들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해주신 것. 믿음의 부모 밑에서 자란 건실한 믿음의 베필이었다. 결혼 후 머슴살이를 하던 친적 집에서 나와 일찍 돌아가신 장인어른을 대신해 처갓집의 기둥 노릇을 했다. 당연히 주일에는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내가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울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장사를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신앙생활은 별다른 진전을 이룩하지 못하고 그저 습관에 젖은 대로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밖에 영적 성숙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특히 시장에 나가 가게를 운영하면서부터는 심각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됐다.

“가게에 물건을 만들어오는 제품업자나 물건을 가져다 파는 소매상 등 거의가 불신자들을 상대하니 자연 이들과 어울리면서 불신자의 생활이 내 생활 깊숙이 스며들게 됐습니다. 그나마도 장사가 잘 안돼 결국 빚잔치를 하게 됐죠. 교회에 나가는 것까지 허무한 것으로만 여겨지니 주일날 낮 예배 한번 드리러 가는 것까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나가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교회 나가기를 소홀하던 이 장로는 담임 목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마음에도 없는 약속을 하게 됐다. 새해부터는 교회에 나가 새롭게 신앙을 다지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것. 이미 뱉은 말,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가게 됐다.

그렇게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담임 목사의 추천으로 서리집사가 됐다. 형식적인 신앙 가운데 수요예배 인도와 설교를 맡게 되면서 점차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묵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 후 신앙의 눈이 떠지려는 즈음에 안수집사까지 됐다.

그때부터 수요예배 시간도 거르지 않고 참예했다. 그를 하나님 또한 어여삐 여겨주셨고, 신앙의 지표는 상승곡선었다. 내친김에 이 장로는 죽을 각오를 하고 새벽기도를 작정했다. 처음에는 일주일 작정이었던 것이 한 달, 두 달 그렇게 기한없이 평생의 새벽기도를 작정하게 됐다. 건강이 허락되지 않을때조차 그는 새벽기도를 거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누가 뭐래도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새벽기도회 또한 교회 공적 예배 등은 거의 거르지 않고 참여하는 생활관이 자리 잡았다.

“만약 실패가 없고 성업이 계속 되었다면 오늘의 나라고 하는 존재는 도저히 찾아 볼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을 외면하고 세속으로 내려가는 불신앙의 길을 하나님이 가로막아 나의 성업을 실패케 하셨지요. 나 같은 미련하고 못난 자를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줄로 얽어 매어 주신 것입니다. 정말 두고두고 이에 대한 감사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1981년 3월 31일 장로 장립 기도 받던날. 축복기도를 받는 이 장로의 마음과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림은 금할 길이 없어 뚝뚝 강대상 마룻바닥에 눈물의 흔적을 남겼다.

이용준 장로는 최근 거처를 천안으로 옮기고 여명교회에 새로운 신앙의 터전을 잡았다.
한편, 그의 길고도 모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가 넘치는 그의 평생의 신앙여정이 담긴 책 ‘비망의 추억담’의 모든 수익금은 개척교회와 해외 선교 헌금으로 쓰여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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