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인 사건’은 한국교회 향한 대박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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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인 사건’은 한국교회 향한 대박해 사건
  • 표성중 기자
  • 승인 2010.06.0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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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연구소 주최 학술세미나에서 이호우 교수 강조

▲ ‘105인 사건’으로 조사받으러 가는 모습. 이 사건으로 기독교인들은 일제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다.
유죄 판결 받은 105명 중 92명이 기독교인
민족의식과 항일사상 고양시키는 결과 낳아

“105인 사건은 식민 통치 직후 일제에 의해 완벽하게 날조되어 일방적으로 재판이 진행된 최대 규모의 한민족 탄압사건이자 한국 교회와 기독인 대박해 사건이었다.”

한국기독교사연구소(소장:박용규 교수, 총신대)가 지난 5일 개최한 ‘제45차 정기학술세미나’에 발표자로 나선 이호우 교수(한국성서대)가 이같이 주장했다.

‘105인 사건’은 지난 1911년 일본총독부가 조선 식민통치를 강화하고, 반일 민족 저항세력들의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수의 신민회원 및 기독인들을 체포해 고문한 사건이다.

1910년 12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이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북지방을 순방할 때 그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고 주장한 일본총독부는 신민회원이나 기독교 신자들이 총독암살 음모를 꾸민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민회원과 평안도 일대의 기독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600여 명을 검거했다.

이후 일본 경찰은 거짓 자백을 받기 위해 고문을 자행했다. 이를 통해 600명 중 123명을 혐의자로 기소했고, 20회의 재판이 진행된 상황에서 105인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하면서 ‘105인 사건’으로 알려지게 됐다.

‘105인 사건’은 일본총독부가 조작하고 날조한 허위 사건이라고 설명한 이호우 교수는 “105인 사건을 신민회를 억압하려는 사건으로 보는 견해와 한국 교회에 대한 탄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이 두 견해가 각기 상반된 것은 아니다”라며 105인 사건과 한국 교회는 많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일본 총독부는 합방을 전후로 조선 식민통치에 있어 기독교 세력을 가장 부담스러워했다”며 “한국 교회가 자신들의 영구적인 식민지로 구축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105인 사건’은 서북지역에 집중된 기독교 세력과 그들을 지도하는 민족 애국지사들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일제의 의도에 의해 꾸며졌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교수는 선교사들을 그들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하고,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한편 축출하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일본은 조선의 애국자와 기독교를 뿌리 뽑으려고 총독암살 미수라는 무형의 사건을 조작했다”며 ‘105인 사건’이 한국 교회 박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은 기소된 123명의 종교 성향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고 피력했다.

즉, 기소된 123명 중 108명이 신문과정에서 자신들의 종교를 밝혔다는 것이다. 108명 중 기독교인이 92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가톨릭 2명, 천도교 2명, 무교 12명이었다.

이 교수는 “전체 85%에 해당되는 기독교인은 목사와 장로, 영수 집사 등 교회 지도급 인사들도 상당히 많았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신민회 회원이기도 했다”며 ‘105인 사건’은 한국 교회를 향한 계획된 박해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결국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박해를 가하기 위해 조작된 ‘105인 사건’으로 인해 서북지방의 기독교계 학교 교사와 학생 및 교계 지도자들이 대거 검거당하면서 한국 교회는 전체적으로 위축됐다.

이 교수는 “이 사건으로 인해 성장일로에 있었던 한국 교회는 1911년과 1912년 사이 상당수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학교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게 됐다”며 ‘105인 사건’은 결국 1907년 대부흥운동과 1909 백만인 구령운동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을 향한 탄압과 박해 사건이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고난과 박해 가운데 교회는 더욱 성장하고 성숙되어 간다는 기독교 발전의 보편적 특성을 이 사건을 통해 한국 교회도 경험하게 됐다”며 ‘105인 사건’은 한국 교회가 일제 35년의 강압적인 통치기를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신앙의 힘을 무장하는 계기를 가져다줬다고 설명했다.

특히 ‘105인 사건’은 기독교인들에게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더욱 고양시켜주는 결과를 낳았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33인의 민족지도자들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이후 국내외에서 활동한 많은 애국지사들 가운데서도 기독교 인사들이 많았다. 이러한 기독교 인사들 중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던 인물들도 상당히 포진해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105인 사건’에 대한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대응은 한일합방 가운데 다소 발생했던 불신과 괴리를 해소하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 교수는 “이 사건은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더 큰 우정과 동정을 가져다 줬다”며 “선교부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유력한 변호인단을 구성해 사건의 허구성과 부당성을 지적하며, 피의자들을 적극 변호했고, 세계 언론에 이 사건을 알림으로써 일제의 간계로부터 한국 교회와 민족지도자들을 보호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고 역설했다.

한편, 한국기독교사연구소는 올해 병탄 100년을 맞아 '100년 전, 하나님의 숨결, 기독인들의 외침'을 주제로 믿음의 선조들의 기도와 열정, 민족을 향한 고뇌 등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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