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대담-청주서문교회 박대훈 목사 "예수 고난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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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청주서문교회 박대훈 목사 "예수 고난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삼자"
  • 승인 2002.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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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신문을 펼쳐보면 온통 부정부패, 비리, 범죄, 도덕적 해이 등 ‘위기’를 대변해주는 기사로 꽉 차 있어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고통이 얼마나 크실까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이러한 총체적 죄악에서 한국교회도, 그리스도인들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할 때 정말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실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가늠자로는 잴 수 없는 성질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막연하게 나마 마음에 새기면서 그의 뒤를 따르겠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고난의 길을 걷는다는 의미가 단순히 눈먼자, 억눌린자, 갇힌자, 버림받은자, 가난한 자들과 일체화시키는 것만으로 착각할 경우가 많지요. 물론 예수께서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심과 가난한 갈릴리인들과 일체화하심과 억눌린자를 위한 삶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서 그의 고난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모르고 불순종하는 죄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의와 부정을 일삼는 모든 죄로부터, 질투와 미움, 불신으로 인한 마음의 죄로부터, 가난한자, 억눌린 자를 돌보지 못하는 죄로부터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이 눈으로 보이는 현상을 포함하여 보이지 않는 마음의 죄까지 모든 것을 망라하여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절을 통해 개인을 포함한 사회적인 죄, 민족의 죄, 세계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억눌린자, 소외된자,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그리스도의 정신도 구현해야 할 것입니다. 고난에 동참하지 않고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 지금 한국 교회는 예언자의 모습이라 보십니까 아니면 회개해야 할 죄인의 모습이라 보십니까?
한국 교회는 예언자의 모습을 상실하여 사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게 사실 아닙니까?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무사안일과 이기주의, 편리주의에 안주하고 있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예언자적 기능을 되살리려면 제일 먼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부터 해야 한다고 봅니다. 가슴을 찢는 회개운동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예레미아 선지자와 같은 심정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 부끄러움을 넘어 두려운 생각마저 듭니다. 힘을 잃어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한마디로 ‘세속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업화의 특징이면서 병폐인 경쟁, 분열, 개인주의, 성장주의, 대형화, 물량주의가 여과없이 교회정신으로 자리잡으면서 한국 교회는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양적 팽창에 비해 신앙이나 신학적 입지는 아직도 유아기적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배금주의, 기복주의 , 권위주의, 변질된 성령운동 등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남에게 나타내길 좋아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예산 규모 등 물질적인 면에 치우치니까 힘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 교회 초기를 한번 살펴보세요. 초기 한국 교회는 봉건제도의 개혁, 제국주의 등 외세 침략에 대처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사회개혁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일제 침략 수난기에 접어들면서 105인 사건, 신사참배 강요 등 수난을 거듭하면서도 민족의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지 않았습니까? 3·1운동 당시 기독교인은 14만 명에 불과했는데 독립선언 33인 중 절반이 기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 교회 수가 수 만개에다 신자들은 1천2백만 명이라고 하는데 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까. 반성해야 할 줄로 압니다.

저는 현재 청주기독교연합회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만 ‘화합과 연합’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역설하고 있지요. 교회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다면 얼마든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 교회’만 잘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는 바꿔야 합니다. 교회가 힘을 다해 지역사회에 유익한 사업을 추진하면 교회의 위상도 서고 신뢰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사회는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깨져야 능력을 회복할 것입니다.

- 에수 그리스도께서 한국 교회를 향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라 보시는지요? 한마디로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원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한번 스스로 얼마나 ‘가진 자’ 인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얼마 전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성요셉 성당에 가보았는데 그 곳에는 1백 년 전 ‘안드레’라는 ‘수사’를 통해 신유의 은사가 일어났을 당시 장애인들이 두고 간 수백 개의 ‘목발’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사용하던 방에 들어가 보니 작은 침대와 옷 2벌, 안경, 주전자 그리고 커피잔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 선생을 비롯하여 존경받던 지도자들은 이렇게 가난한 삶을 살았기에 많은 이들에게 신앙의 불을 당겼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고난의 절정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아닙니까?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나누어 주는 삶을 살고 어려운 이웃의 눈물을 씻어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몰트만 박사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있는 “고난과 구원의 전통적 십자가 신앙을 넘어 고난을 통해 자유와 희망이 오는 것”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고난 뒤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다는 사실을 우리 기독인들은 깨달아야 하겠지요.
다음으로 반성해야 할 것은 한국 교회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전락해가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배도 모양과 형식은 있으나 알맹이가 빠져있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정말 한국 교회가 ‘본질 회복’ 문제를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요. 설교를 할 때도 듣기 좋은 얘기가 대부분 아닙니까? 교단장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돈 선거’ 시비 등 교회가 회개해야 할 일이 어디 한두 가지 이겠습니까?

-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으로만 끝내지 말고 작은 일이라도 교회에서 이웃울 위한 프로그램으로 마련할 수 있을 텐데요. 할 수 있는 일들은 많겠지요. 저희 교회에서는 10kg짜리 쌀부대를 교회 앞에 쌓아 놓고 가난한 이웃이나 신자 중에 가난한 분들은 가져가시도록 할 계획입니다. 어느 권사님의 장례식 때 부의금이나 조화를 모두 사절하고 대신 쌀로 받아 장례식 후에 고아원과 양로원으로 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희 교회는 또 5월과 10월 교회 마당에서 복음성가 가수들을 초청, 작은음악회를 열어 이 때도 생활필수품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행사를 가질 계획입니다.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서문교회는 15개 국에 18명의 선교사를 파송, 선교사 생활비로 년 4억 원을 지출하고 있는데 장로들을 비롯 온 교우들이 선교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미자립교회도 1백 교회에 매월 10~20만 원 씩 보조하고 있다고 한다.
박대훈 목사는 “365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능력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대담자:최명국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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