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 본 ‘무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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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 본 ‘무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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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3.1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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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은혜 안에서 절제하는 안빈낙도의 삶”
■무소유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불교의 무소유는 범신론적 세계관의 한계성 드러내
청빈의 수도사 프란체스코처럼 성경에서 깨달음 얻어야

지난 50년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길을 내달려온 한국 사회는 너나없이 탐욕에 사로잡혀 돈과 물질을 좇는 사회였다. 이 가운데 무소유(無所有)와 ‘나눔’의 정신은 모든 이에게 어필한다. 법정 스님 몸은 대나무 평상에 누워 불길 속에서 사라졌지만 세속의 탐욕에 물들지 않았던 그분의 삶은 깊은 감동을 남겼다. 종교의 유무나 소속 종교를 넘어서서 보는 모든 이들에게 무소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지도록 한다.

1. 기독교와 불교의 무소유 개념 차이
이 시대에 법정 스님이 뭇사람들에게 이른 ‘무소유’는 분수를 알고 욕망을 다스리라며 내리치는 죽비 소리였다. 그것은 높고 어려운 불법(佛法)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부처의 마음 바로 그것이다. 불교의 무소유는 인간 내면적인 정신의 노력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내면적 정신은 창조된 순수성에서 부패한 모든 인간에게 있는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 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원장, 기독교학술원장)
스님은 이것을 비범하게 발굴하신 것이다. 이 발굴이 영혼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나 그 깨뜨려진 형상의 잔재 위대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적 수행(修行)은 중생의 고통과 업보를 홀로 짊어지는 자력 구원의 몸부림이며, 인간과 자연과 신을 동일시하는 범신론적 세계관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적 무소유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이다. 구약의 예언자 하박국의 시가 하나님 안에서의 무소유의 삶을 잘 표현해준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중세의 무소유 수도사 성 프란체스코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을 내놓았을 때 자연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발견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가치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에게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는 마음의 가난함으로써 주님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창조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깨달은 것이다.

예수는 사회적으로는 존경받는 신분과 안정된 삶을 누리던 서기관에게 이르신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

2. 기독교 시각에서 보는 무소유
예수는 이 서기관에게 자기를 따르려면 거처도 없고, 보호막도 없는 처지에 동참해야할 것을 일러주신 것이다. 예수는 무소유자였으나 부(富)한 자를 적대시 하지 않았다. 그의 친구 가운데는 부자들도 있었다.

예수를 지지한 사람 중에는 부자 아리마데 요셉(마27:57), 가버나움의 백부장(눅7;2). 베다니 가정(눅10;38), 자기 소유로 예수를 섬긴 여인들(눅8:3) 등이 있다. 예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써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은 부자를 증오하고 가난한 자를 두둔하라는 것이 아니다. 부자는 재산이 많기 때문에 음부에 간 것이 아니고, 거지 나사로는 소유가 적기 때문에 낙원에 간 것이 아니다. 내세에서 이들의 처지가 달라진 것은 이 세상에서 부자(富者)는 열락의 생활만을 했으나, 나사로는 믿음의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눅16:19~22).

나사로가 죽어서 그 품에 안긴 구약(舊約)의 아브라함은 그 시대에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눅18:22)고 말씀하신 것은 천국은 무소유자가 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자 청년은 소유가 많으므로(눅18:23) 그가 가진 재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하신 것이다.

▲ 성 프란체스코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을 내려놓고 창조의 가치를 깨달았다.
3. 성(聖) 프란체스코의 무소유의 삶
우리는 예수의 삶을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게 산 청빈의 수도자 중세의 성 프란체스코로부터 배울 수 있다. 첫째, 성 프란체스코의 이상은 청빈한 생활이요 하나님만을 아는 생활이었다. 성 프란체스코는 체험을 통해서 성경에서 가르치던 가난과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었던 가난을 통한 복음운동을 자기 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청빈이었다. 성 프란체스코는 마태복음 10장 9~16절을 자기 삶의 기본으로 받아들이고 사도적 삶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가난이라는 부인(Lady Poverty)과 연애했다. 어떤 이유에서도 돈은 절대로 받지 않았으며 옷도 입은 옷 이외 가져서는 안되며, 먹는 것도 예비해서는 안되었다. 소유로부터의 자유가 즐거운 것임을 발견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둘째, 가난한 자는 성 프란체스코에게 자비심이나 동정심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준 선생이었다. 가난한 자들은 그의 눈을 열어주었다. 성 프란체스코는 이들에게서 인내하는 것을 배웠고, 그들을 보면서 진정한 참회를 배웠다. 이들을 통해서 성 프란체스코는 청빈,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을 배웠다.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단지 자비의 표현이요 첫 단계일 뿐이다.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은 가난한 자를 도우는 구제나 자선과는 전혀 다르다.

4. 무소유의 삶을 사는 성경적인 방향성: 세계내적 금욕주의
부자란 재물이 단지 많은 자를 말하지는 않는다. 재물이 많은 청부(淸富)도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욥, 아리마데 요셉 등은 청부(淸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재물욕으로 가득 찬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재물은 개인적인 욕심과 자만(自慢)과 호사(豪奢)스러운 소비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이웃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필요한 자들에 대한 구제와 나눔이 필요하다. 이 지상에서 이들과 나눌 수 있을 때 진정하게 하늘나라의 곳간에 저축하는 것이 된다.

예수는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눅12:15)고 가르치신다. 인간 생명의 의미란 재물과 권력의 풍부에 있지 않고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 구제하고 나누는 마음의 넉넉한 데 있다. 재물의 나눔은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절제하며, 가난한 이웃에게는 부요(富饒)한 태도로 나타난다.

지상의 소유란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 곳간을 넓히고 스스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에 끝나서는 안된다. 하나님께 재물을 주심을 감사드리는 태도는 단지 종교적 예물을 드리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 대한 배려와 나눔으로 연결 되어야 한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하여 재물을 자기 곳간에 쌓지 말고 소외되고 궁핍한 자들과 나누어 사용함으로 부를 하늘나라 창고에 저축하라고 가르치신다.

칼빈주의자들은 세계내적인 금욕주의를 윤리적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 근검절약의 정신으로 살았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정신이 되었다고 막스 베버는 말하고 있다. 세계내적 금욕주의란 불교처럼 이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 안에서 물욕과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규제하면서 절도 있게 사는 삶이다. 오늘날처럼 성공과 번영이 지나치게 추구되는 시대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빈낙도하는 절제하는 삶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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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Lee 2010-03-27 04:39:48
교수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법정 스님의 무소유 가르침이 세인의 이목을 끄는 중 기독교신자인 저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무소유 교훈을 해설한 글을 찾던 중 이 글을 발견하고 반가웠습니다. 매우 성서적이고 논리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세계내적"이란 어휘를 써셨는데 생소하군요. 이 말의 뜻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