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양용근목사 1905-1943

l승인2005.02.22 17:04:00l8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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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반대하다 옥중 순교    

일본 관동대학살 때 구사일생 살아나 목회자의 길 결심   


양용근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불경죄로 체포돼 민족의 해방을 끝내 보지 못하고 옥중 순교한 신앙인이다.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그가 전공한 법률은 어디에도 사용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 1933년 늦은 나이에 장로회신학교로 들어가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법률을 공부한 양목사가 갑자기 신학쪽으로 방향을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양용근목사가 일본 유학 중 겪은 ‘관동대참사’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정책이 어느정도인지 드러낸 사건으로 기록된다. 관동대지진이 있던 당시 유학생활을 하던 양목사는, 지진으로 인한 혼란스런 민심을 수습하려는 의도로 ‘한국인에 의한 방화설’을 퍼트린 일본 당국의 정책에 분노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무조건 죽이고 때리는 등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네로에 의한 ‘로마 대화재사건’을 은폐하려고 기독교인 방화설을 유포, 큰 박해를 받은 사건이 되풀이 되는 순간이어다.


그는 참혹한 시기 속에서 죽음으로부터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귀국 즉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장로교신학교 34회로 졸업한 그는 안수받고 여수의 애양원교회에서 사역하며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섬겼다. 그 후 구례의 길두교회, 광양읍교회 등에서 사역한 것으로 전해진다.


양용근목사는 관동대지진 사건 이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남달랐다. 신사참배 가결을 압박하던 일제에 맞서 끝까지 투쟁한 이면에는 양목사가 겪은 처참한 광경들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1941년 순천노회를 필두로 이루어진 참배반대 투쟁은 교역자 검속을 강화했던 원탁회사건을 계기로 첨예하게 나타났다.



결국 그는 고흥의 연합사경회에서 신사참배를 비난해 불경죄로 체포되어 1943년 12월5일 순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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