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성공리더십9-1: 성공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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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성공리더십9-1: 성공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 승인 2009.06.1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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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성공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성공한 사람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빠른 시간 안에 쉽게 성공했다는 인식이다. 조금 요령부리고 누군가가 도와주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느끼는 것 같다. 일견 맞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한 사람들이 준비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 부분에서 성공했다는 말을 듣는 까닭은 아무리 깎아 내려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성공을 위해 수없이 많은 고뇌의 밤을 지새운 내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얼마만큼 준비했느냐가 중요하다. 얼마만큼 실패 했느냐도 준비 속에 들어있다. 실패야말로 성공과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 이유는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는 자각에서 온다. 부족한 인간이 ‘성공’만을 거듭할 수는 없지 않는가? 성공만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또한 준비에는 자신의 많은 것이 투자된다. 시간 지식 재물 등, 때에 따라 가족의 희생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의 준비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않는 성공이 다가오는 것이다. 피아노의 거장 루빈스타인은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자기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동료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고 말했다. 또한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피아노를 잘 칠 수 있느냐의 질문에 대해 “매일 6-8시간을 연습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라”고 말했다.

이런 혹독한 훈련은 성공한 사람들의 대체적인 공약수라고 볼 수 있다. 시합의 승패는 언제 결정되는가? 월드컵 4강신화의 결과는 예선전 3경기 16강, 8강, 4강전 등 6경기가 결정지었는가? 아니다. 4년을 준비하고 갈고 닦은 결과물이다. 당신은 그것을 놓치고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성공에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것이다. 시합장에서 뭔가를 해서 결정을 지으려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모습이고, 시합 전에 충분히 준비하고 시합에 임하는 사람들이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생긴 말이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이 아닌가? 성공은 그러므로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결코 결과가 아니다. 결과처럼 보일 뿐이다. 과정이 없는 성공은 언젠가 구멍이 난다. 과정이 없었으므로 결과가 난 다음에도 계속 성공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유지하는 과정이 눈물겹다. 왜냐하면 계속 구멍을 때우고 때에 따라서는 속이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예수의 생애는 33년 반이었다. 참으로 청년 예수다. 너무 짧은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준비하는 시간이 30년이었고 일하는 시간은 3년 반에 지나지 않았다. 일하는 시간은 준비하는 시간에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실패자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도바울은 그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아라비아 광야에서의 준비기간이 있었다.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1:17-18). 모세도 조국을 구원하기에 앞서 40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에서 목동으로 준비하며 지냈다.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사십 년이 차 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출3:29-30).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 들렸다면서 예수를 찾아왔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부르짖었지만 웬일인지 예수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무안을 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막7:24). 이 말의 뜻인즉, 너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예수는 이 여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막7:26)고 말씀하셨다. 상대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인격적인 아픔을 주는 말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7)라고 했다. 이 여인은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예수께 온 목적을 상실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기다리심이다. 상대가 온갖 장애물을 물리치고 자신의 간절함을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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