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정통교리·경건체험·변혁실천 ‘삼위일체적 균형’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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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정통교리·경건체험·변혁실천 ‘삼위일체적 균형’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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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11.1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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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 총회(구 합동정통)의 신학적 정체성-한국교회 성장과 연합을 위한 비전과 사명 (하)
▲ 지난 2일 백석아트홀에서 열린 ‘제2차 생명신학 포럼’에서는 개혁주의 생명신학은 산 신학이며, 실천을 통한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신학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진섭교수 백석대 대학원신학부총장>


김준삼-최순직-장종현박사, 개혁주의 생명신학 확립의 ‘삼겹줄’ 기초 마련

김준삼 ‘교리’ 최순직 ‘경건’ 장종현 ‘변혁’강조 개혁신학 전통 이어

“신학의 주체는 인간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 구원의 복음 실천·전파가 목적


6. 예장백석 교단과 백석학원의 개혁주의 생명신학 확립의 ‘삼겹줄’(전 4:12)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장로교 전통에는 역사적으로 세 가지 유형이 상호보완적으로 나타난다. 첫째,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질문을 초점으로 성경에 기초한 신경과 신조의 이론적인 ‘교리’를 중시하는 전통과, 둘째, “어떻게 하나님을 체험하는가?”라는 질문을 초점으로 하나님과의 개인 체험적 관계의 실천적인 ‘경건’을 강조하는 전통과, 셋째, “어떻게 복음을 세상에 연결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을 초점으로 개혁주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문화-선교적 사명에의 총체적 ‘변혁’을 강조하는 전통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 가운데 예장백석 교단과 백석학원(백석대학교, 백석문화대학, 백석예술대학, 백석신학교)의 태생과 괄목할만한 성장발전의 배경에도 역시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실천을 향하여 그 중심점인 장종현 박사(변혁)와 아론과 훌의 역할을 담당한 김준삼(교리), 최순직(경건) 두 조직신학자로 구성된 삼겹줄과, 그 배후에 먼저 강의나 설교 때 눈물을 흘리며 목청을 다하고 얼굴까지 빨갛게 타오르던 ‘한국의 예레미야’로 칭송된 ‘불타는 교수 전도자’ 김치선 박사(1899-1968)를 예비하셔서 최순직과 김준삼의 신학과 목회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하였다.

함남 흥남 출신인 김치선 박사는 평양신학교 전통을 계승하면서 주경야독하는 사역자들을 위한 야간 장로회신학교인 대한신학교(1948.8)의 설립자로서, 같은 해 박형룡 박사가 세운 주간 장로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의 전신)와 교수진을 공유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이 공포한 “한 교단에 한 신학교” 법령을 따라 미국 ICCC의 칼 맥킨타이어의 원조로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1961.6)를 설립하고 초대총회장을 역임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로 개명하여(1972.4) 오늘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다(참조. 그의 딸 김동화가 쓴 전기인 ‘나에게 있어 영원한 것’, 서울: 기독교연합신문사, 1998; 박상경, ‘역사적 기독교에 있어서 대신교단 신학의 정통성’, 서울: 성지원 2003).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1927-28), 어릴 때부터 신앙의 대부인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의 영재형(L. L. Young) 선교사가 소속교단의 좌경에 반대하여 일본으로 임지를 옮김에 따라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오카다 미노루(岡田 稔)가 있는 고베(神戶)중앙신학교(현 고베개혁파신학교)를 졸업한 후(1930), 신학적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독립하여 1929년 갓 세워진 개혁주의를 대표하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1931-33), 그 학교 내에 공존하는 두 학파, 즉 그레샴 메이첸을 중심한 구학파(Old School)와는 달리 칼 맥킨타이어, 알란 매크레, 올리버 버즈웰 등을 중심으로 노예제 폐지나 주류금지, 자유주의 신신학에 대한 철저한 반대,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세대주의 용인, 반공사상을 강조하는 신학파(New School)의 영향을 받아 1924년에 설립된 세대주의를 대표하는 달라스신학교에서 구약학으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1933-35).

그는 신학교수이기 전에 강한 열정의 복음전도자로서 삼천만의 십일조인 삼백만을 돌아오게 하는 ‘삼백만부흥전도회’를 결성하고, ‘2만8천 여 동네에 우물을 파라’는 구호 하에 70명의 전도목사를 전국에 파송하며, 본인 자신이 부흥사들을 이끌고 전국을 돌면서 은사집회를 개최하는 구령사업과 애국운동에 진력하였다. 동시에 개혁신학자 박형룡 박사는 물론 감리교의 변홍규, 성결교의 이명직 박사들을 비롯한 타교파의 지도급 인사들도 대한신학교에서 강의에 초빙하는 ‘초교파적’ 근본주의자였으며, 세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관성 있는 개혁주의자도 아니었다.

박태선이 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하여 김치선박사가 목회하던 남대문교회에서 집사가 되고, 그를 따라 창동교회로 옮겨 장로로 임직되어 1955년 봄 악령에 사로잡혀 전도관의 교주가 되기까지 봉직한 일화는 불타는 교수 전도자인 김치선의 일면을 보게 한다.

(1) 교리 강조 개혁신학 전통:김준삼 박사(1929-2008)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질문을 초점으로 하는 이 개혁주의 전통에 따르면, 자의적인 성경 이해를 피하기 위해 성경이 가르치고 교회가 전수한 신앙고백과 신조에 반영된 기독교 교리들을 중시한다.

그러나 교회와 그 전통을 절대시하여 성경해석도 교회의 결정과 가르침에 종속된다고 보는 로마 가톨릭이나 교조주의 입장이나, 성경을 주관적으로 이해하고 교리 없는 기독교를 주장하는 신령파적 교회의 양극단과는 달리, 교리 지향의 개혁주의 신학은 계시의 말씀과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양자의 긴장 관계에서 이해하려는 종교개혁자들의 올바른 교회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즉 고정된 개념이나 체계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온 것이므로 새로운 전개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어, 신조교회로서 교회 일치라는 통일성을 위하여 교리규준을 유지하는 한편,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되는 것이 있다고 확증될 때는 얼마든지 공적으로 표명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교회는 거기에 대한 비판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 논할 수 있고 또 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단과 자유주의 신학, 종교다원화와 극단적 보수신학의 현대의 정황 속에서 바른 성경적 교리를 통해 역사적 교회가 지켜온 신조의 정통성을 유지함은 건강한 교회와 신학교육으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기틀을 제공한다.

초대 공교회의 ‘신경’(Creed; 사도신경, 니케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칼케돈, 아타나시우스)의 전통 위에, 16세기 종교개혁의 ‘신앙고백’(Confession; 헬베틱, 제네바, 하이델베르크)과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의 여러 신조(웨스트민스터표준문서, 벨직 ‘네덜란드’신앙고백서, 도르트레히트 규범)로 구성된 40여 개의 개혁교회 신조들과 19세기 이후 찰스 하지, B. B. 워필드, 아브라함 카이퍼, 루이스 벌코프, 헤르만 바빙크, 그레샴 메이첸, 코넬리우스 반틸 등에 의해 형성된 신학적 체계가 포함된다.

김준삼 박사는 이러한 전통을 따라 남다른 열정으로 신조학을 가르치며 루이스 벌코프로 대표되는 개혁신학으로 예장백석 교단과 백석학원의 신학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 노심초사 크게 진력하고 기여한 인물이다(참조. ‘김준삼 박사의 생애와 사상’및 ‘사진으로 보는 김준삼 박사의 생애’, 천안: 김준삼박사 추모기념집 출판위원회, 2009).

그는 평북 정주 출신으로 단독 남하하여 18년(1951-69) 군복무의 중령 예편과 대한신학교 재학 시(1962-64) 김치선-최순직에게서 배웠으며, 졸업 후 김치선이 시무하는 청파장로교회에서 집사 2년, 장로 8년, 목사안수까지 10년(1962.3-1972.4)의 봉직 직후 최순직의 추천으로 그가 이미 유학했던 일본의 고베개혁파신학교에서 2년간(1972.5-1974.4) 이미 은퇴한 오카다 교수의 강의는 물론 “교리학, 특별히 신조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하였고, 총신대학교(합동) 목회신학원(1977.8-1980.2)을 졸업했으며, 대한신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1974-1981), 예장대신 교단의 목사(1975-1981), 노회장(1979), 총회장(1979-80)으로 각각 봉직하였다.

그가 1980년 9월 백석학원으로 부임하여 소천 할 때까지 28년 동안 학원이사장, 기독신학교 학장 및 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고, 교단적으로는 총신교회(현 백석대학교회 전신) 설립과 담임목사 및 합동정통 총회장(1989)으로 봉사했다. 그의 생애는 운곡교회 위임목사 취임예배(1977.3.1)에서 자신이 설교한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요약된다면, 한국의 눈물의 예레미야요 교수 전도자인 김치선과 후론할 조직신학의 스승-선배-동료로서 경건과 기도의 본이 된 최순직이 끼친 감화를 통해 무미건조한 교조주의가 아니라 장종현 박사가 주창하는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실천”에 적극적인 동역이 가능했다.

만학도였지만 몸에 배인 성실성으로 백석학원 신학자들의 신간도서를 비롯한 최근 동향들을 일일이 메모 평가하면서, 개혁신학을 전수하는 일에 마지막 순간까지 불철주야 최선을 다하여, ‘교의신학 I-III’(서울: 총신, 1994-199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86)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인간 삼분설(영, 혼 육)이 아닌 이분설(영혼, 육체), 무천년설, 백석학원 교직원 예배 시 사도신경 이외의 초대 공교회 신경 신앙고백, 사순절의 교직원 릴레이 기도회를 중심한 교회력의 존중, 주야간 수업전기도회 등의 교육전통을 확립했다. 고혈압으로 쓰러져(2000.12.27) 삼성병원에 40일간 입원한 후에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면서, 중국, 러시아, 필리핀, 미국 등을 방학을 이용하여 순방하면서 교회지도자 교육에 힘쓴 것과, 그가 임종 직전 의사를 부르려는 가족 앞에 “왜 천국에 가려는데 가지 못하도록 하느냐? 하나님께 가도록 나를 그냥 두라!”는 마지막 당부는 딱딱한 개혁신학 교리에만 머물지 않는 생명신학의 실천적 삶이었다는 감동적인 실례가 될 것이다.


(2) 경건 강조 개혁신학 전통:최순직 박사(1923-1999)

“어떻게 하나님을 체험하는가?”라는 질문을 초점으로 하는 이 개혁주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중시한다. 바로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이었던 기도, 성경읽기, 부흥사경회, 주일 성수와 십일조, 전도와 구제와 같은 것이 그 실례이다.

예장백석 교단과 백석학원에서 이러한 전통을 세우고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 바로 최순직 박사이다(참조. ‘최순직 박사의 신학사상’및 ‘사진으로 보는 최순직 박사의 생애’, 천안: 백석정신아카데미, 2009).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플러스 인간의 삶’(서울: 서울서적, 1984)이란 자서전 제목이 암시하듯이, 함경남도 산골의 불신가정에서 태어나 22세에 폐병에 걸려 5년 동안 사경을 헤매었고, 흥남철수작전 때 혈혈단신 사선을 넘어 월남하였으며, 거제도와 부산에서 월남한 피난민과 함께 가난하고 힘든 목회를 8년간 하였고, 김치선의 사위로서 처가살이 17년의 눈치 아래 대한신학교에서 근무했으며, 4년 이상의 일본 유학 동안 북한의 모친을 비롯한 이산가족의 고통과, 53세의 허약한 몸으로 미국 이민자의 삶으로서 약 6년간의 생지옥 같은 노동의 짐에다가, 김치선 박사의 아들 세창과의 다양한 갈등과, 일평생 힘에 지나는 병약(病弱)으로 인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는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고,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는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실천”의 경건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환갑을 바라보는 미국 이민자의 삶 속에서 고국에서 마지막 교수 사명을 다할 기회를 눈물로 간구하던 중, 장종현 박사의 청빙으로 그의 성화과정의 마지막 단계인 15년을 백석학원과 예장백석 교단에서 봉직하면서, 합동정통 총회장(1981), 총회신학교 연구원(대학원과정)장(1981.3-1991.2), 3대 학장(1983.3-1995.2), 신학원장(1983.3-1984.2), 총신 기술학교 교장(1984.3-1994.8), 천안 기독신학교 초대 학장(1994-1995)을 역임한 것은 본인과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큰 선물인 셈이다.

그는 먼저 개혁주의 조직신학자로서 예장대신 교단의 ‘교회선언’(1974)과 예장백석 교단의 ‘합동정통교단 노선 선언문’(1989)을 초안했으며, 자신의 주저인 ‘신학서설’(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에서 요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형식을 따르며, 칼빈이 주장하는 “율법의 제3 용도”를 계승 발전시켜 율법 혹은 도덕법이 신자의 신앙과 삶의 항구적 원리라고 고백하는 신율(神律)주의를 지지한다. 그리하여 미국 이민자로서의 체험에 서 비롯된 ‘6일의 신학: 기독교 노동론’(서울: 총신, 1987), ‘크리스챤의 생활규준: 복음하의 율법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등을 저술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점으로서, 첫째,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객관적 신앙에 치중한 나머지 성경의 주관적 적용의 매개자이신 성령님의 사역을 중시하지 않음과, 둘째,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됨’(unity)과 ‘거룩함’(purity)의 긴장관계가 적절히 유지되지 못하여 너무 쉽게 분열함과(참조. 한국 장로교 200개 교단의 현실), 셋째, 잘못된 예정론을 앞세워 전도 열정이 감소함에서 오는 교회성장의 둔화를 지적하였다.

그는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한 신학자”로 부인(김동화)과 제자(조석만)에 의해 인정될 만큼 하나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경건한 삶이었으며, 그의 파란만장한 시련의 체험과 풍부한 목회 경험은 그의 개혁주의 조직신학 강의를 부흥회의 설교와 분간할 수 없게 하였고, 졸업생들이 그의 강의노트 만큼은 꼭 지참했다고 할 정도로 목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경건 지향의 개혁주의 신학이 예장백석 교단과 백석학원의 구성원 개개인의 경건 훈련에 큰 역할을 감당하게 했다.


(3) 변혁 강조 개혁신학 전통:장종현 박사

“어떻게 복음을 세상에 연결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을 초점으로 하는 이 개혁주의 전통에 따르면 세계관과 문화관, 문화의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등과 같은 주제를 중심으로 신학을 펼친다. 변혁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전통의 선봉장으로는 정치가며 신학자며 교육가로서 네덜란드 수상을 지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를 들 수 있다. 그는 네덜란드 자유대학교를 세우고 하나님 주권사상과 일반은총론, 영역주권(sphere sovereignty) 등을 통해 신앙과 학문을 접목시키는데 큰 공헌을 남겼다.

백석학원의 설립자요 예장백석 교단의 모체인 복음총회의 초대총회장인 장종현 박사는 대한신학교에서(1974-77) 최순직 박사가 미국이민을 가기까지(1975.8) 조직신학과, 1974년 봄 학기부터 조직신학 분야에 교수하던 김준삼 박사로부터 ‘신조학’을 각각 배웠고, 또한 그들을 예장대신으로부터 영입하였기에 처음부터 백석학원과 예장백석 교단이 장로교회의 개혁신학 정체성 위에 성장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생을 양성하는데 그치지 않고,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하여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지향하며 모든 학문에서 그리스도의 주(主) 되심을 도모하는 “기독교대학의 글로벌 리더”를 지향하는 백석예술대학을 일찍이 설립하였으며(1983), 또한 백석대학교(1990)와 백석문화대학(1993)을 설립하였다(참조. ‘학교법인 백석대학교 30년사’ 및 ‘사진으로 보는 학교법인 백석대학교 30년사’, 천안: 학교법인 백석대학교 역사편찬위원회, 2007).

앞서 살핀 교리 지향과 경건 지향의 유형과 마찬가지로 변혁 지향의 장종현 역시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개혁신학을 강조한다.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이루어지기에 인간의 의지와 가능성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 선택, 예정 그리고 섭리에 큰 비중을 둔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궁극적 권위로 삼고 하나님 중심을 지향하는 신학은 인간의 구원을 개인적 측면에 국한시키지 않고 창조 세계 전체, 나아가 우주적 측면에서 이해한다. 하나님의 우주·인간창조(창 1-2장)-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속(창 3장 - 계 20장)-하나님의 우주·인간완성(계 21-22장)이란 성경의 전체구도를 따라 소망적 직선사관인 창조사관으로 성경과 역사를 이해한다.

이러한 기독교적 세계관과 문화관을 가진 신자는 인간의 죄로 인해 아직 하나님의 통치 아래 온전히 귀속되지 않은 부분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즉 복음 전도, 기도, 영적인 성장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의 개인적인 성장과 더불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해 나가야 할 ‘문화-선교적 사명’(cultural-missional mandate; 창 1:26-28; 마 28:18-20)을 가진 것이다. 이러한 변혁적 사고는 창조세계에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인식하고,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을 구현하는 일에 앞장서게 한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정통 교리와 경건 체험과 변혁 실천의 3 유형이 삼위일체적 균형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교리 지향의 유형은 백석학원과 예장백석 교단의 신학이 최상의 개혁신학 전통 위에 서있도록 했으며, 경건 지향의 유형은 그 신학이 실천성을 잃지 않게 했다. 변혁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교회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창조세계 전체에 회복됨이라는 사명의 한 부분을 백석학원과 예장백석 교단에 속한 모든 개개인이 감당해야 함을 역설한다.

따라서 비록 장종현 박사가 대한신학교 출신이요, 김준삼, 최순직 두 박사가 대한신학교에서 자신을 가르친 스승이었고, 앞서 지적한 대로 대한신학교의 설립자 김치선 박사는 최순직 박사의 장인이요, 최순직 박사는 김준삼 박사의 스승이었지만, 두 교수를 각각 대한신학교에서 백석학원으로 청빙하여 ‘삼겹줄’(전 4:12)에 의하여 학교와 교단이 오늘에 이르도록 동반성장의 터전을 확립하게 된 배경에는 대한신학교가 안고 있던 신학적인 변화, 즉 김치선의 아들인 김세창 교장은 ‘개혁신학’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연계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있음을 드러낸다.

장종현 박사는 개혁신학의 교리, 경건, 변혁의 세 가지 측면의 핵심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음을 강조한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성령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생명이다”(참조. 롬 11:36; 엡 2:18). 교리를 이성적으로 깨닫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거듭 강조한다. 신학의 주체가 생명의 영인 성령님이요, 그 내용이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요, 그 진리를 계시하는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지만, 회개와 눈물, 사랑과 기도, 자기 변혁과 희생과 같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시위되지 않는 개혁신학은 박물관의 박제와 같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합리적 분석과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눌 분이시며, 신학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은 성부 하나님의 주관하심과 성자 예수님의 구속 사역과 성령님의 조명으로 성경 말씀을 이해하며, 성경의 중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실천하고 전파함을 목적으로 한다. 동일한 개혁신학을 가지고도 십자가의 자아포기와 자기희생의 개혁을 하지 못하고 200개의 장로교단으로 분열된 상태로 표류하는 “한국 개혁주의는 죽었다”고 진단하면서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실천”의 사활성을 주창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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